한국어로 해주세요
우리 집 강아지, 빼꼼이는 조금 독특하다.
미국 시민권자이지만 한국어만 알아듣는다. 이름도 특이하다. 눈이 빼꼼해서 '빼꼼'이라 지어줬다.
그런데 이 이름, 미국 사람들 입에는 영 안 붙는다.
"P…pekkum? Bek…kom?" 하며 혀 꼬부라지는 소리만 들린다. 발음이 비슷한 미국 이름을 찾다가 결국 축구 스타 David Beckham (데이비드 베컴)에서 따와 'Beckham(베컴)'으로 지었다. 그러면 다들 "Oh, like David Beckham?" 하며 눈이 반짝인다.
"Is he fast like David Beckham?" (데이비드 베컴처럼 빨라? “)하고 묻기도 한다.
우린 "Totally!" (당연하지!") 라며 웃는다.
사실 빼꼼이는 산책 중 개 친구가 "안녕!" 하며 다가오면 꼬리 내리고 울타리 뒤로 숨거나 짖기 바쁘다.
사교성 제로다.
빼꼼이가 사는 우리 동네는 한적한 미국 교외다.
넓은 잔디밭, 울창한 나무, 고양이보다도 느긋한 이웃들. 빼꼼이는 이 동네를 자기 영토로 착각한다. 남의 집 앞마당을 "내 땅!" 하며 터벅터벅 걷고, 지나가는 차에 "월월! 세금 내!" 하며 짖었다.
산책길에 만난 사람이 "What a cute pup!"("귀여운 강아지야!") 하며 다가와도 "누구세요?" 하며 으르렁.
심지어 "You’re so handsome"("너무 멋있다!") 같은 칭찬에도 "내 미모 평가하지 마!" 하는 듯 짖었다.
친해지려면 최소 다섯 번은 만나야 한다.
첫 번째는 짖기, 두 번째는 꼬리 뻣뻣, 세 번째는 냄새 맡기, 네 번째는 "혹시 간식?" 하며 슬쩍 다가가기, 다섯 번째는 겨우 손 핥기.
사실 이 모든 건 영어를 못 알아들어서 그렇다. 몇 번을 봐야 못 알아들어도 느낌으로 말을 알아듣는 거다.
동물병원은 빼꼼이의 한국어 실력이 빛나는 무대였다.
간호사가 "Is he bilingual?" ("이중언어 하나요?")하면 우린 "Nope, Korean only!" ("아니요, 한국어만요!") 하며 웃었다. 강아지한테 bilingual 이냐고 묻는 상황도 참 재미있다.
의사가 "Sit!" 하면 빼꼼이는 "뭐라는 거지?" 하며 멀뚱.
내가 "앉아!" 하면 바로 엉덩이 착. "Stay!"는 무시, "기다려!" 하면 꼼짝없이 대기.
처음엔 의사도 간호사도 "얘 좀 고집쟁이네" 했다. 진찰실로 데려가려는데 바닥에 접착제라도 발라놓은 것처럼 꿈쩍도 안 하고 버티는 빼꼼이를 보며 간호사가 웃으며 말했다.
"He’s a bit stubborn, huh?" (고집이 있네요?")
나는 웃으며 "빼꼼아, 가자" 하자, 순간 귀가 쫑긋,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폴짝폴짝 의사 선생님 뒤를 따라가는 거였다.
그 순간, 모두의 얼굴에 같은 표정이 떠올랐다. 아, 이 녀석이 말을 안 듣는 게 아니라… '영어를 몰랐던 거였구나.'
얼마 전 우리가 한국 여행을 오면서 빼꼼이를 딸이 사는 도시로 데리고 갔다.
차, 사람, 개로 북적북적, 시골 개 빼꼼이에게 충격과 공포였다고 했다.
다행히 딸 회사엔 애견 동반 출근 제도가 있어 빼꼼이도 가끔 데리고 출근한다.
딸 회사에서도 웃긴 일이 있었다.
직원들이 "So cute! Beckham~" 하고 불러도 빼꼼이는 뒤도 안 돌아봤다.
자기 부르는 줄도 모르고, 완전 무시 모드다.
결국 딸이 "얘는 한국 이름 '빼꼼'이라 해야 알아들어 ‘했더니 그날부터 직원들이 안 되는 한국식 발음으로,
"빼.. 코미아~"
"빼.. 코마아"
부르기 시작했다.
그 풍경이 얼마나 웃기는지.
금발 머리, 흑인 친구, 인도계 친구까지 다 같이
"빼.. 코마..."
하는데, 그때서야 빼꼼이는 귀 쫑긋하며 뒤돌아보며 아는 척했다.
강아지 하나 때문에 사무실에 한국어 열풍이 불 줄 누가 알았겠나.
사무실엔 개들이 많아 처음엔 겁에 질렸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니 적응했다.
그래도 딸이 "집에 가자!" 하면 제일 신나게 꼬리를 흔든다. 역시 집이 제일 편한 집돌이다.
오늘 딸이 보내온 사진들.
집이 세상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