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는 필요 없어요
한국에서의 로드트립 시작.
차 안엔 고소한 커피 향과 우리의 이런저런 대화 소리가 퍼졌지만, 고속도로에 올라타자마자 내비게이션이 분위기를 확 깨버렸다. 마치 군대 교관처럼 우렁차게 호령했다.
"1킬로미터 앞, 이동식 단속구간! 속도 줄여!"
좋아하는 플레이리스트로 맞서봤지만 허사였다. 볼륨을 키우면 네비의 기계음이 더 뚫고 나왔고, 결국 음악은 포기하고, 네비의 단속 방송을 VIP석에서 감상하며 달렸다.
"지금 속도 몇?"
"80 맞지?"
"앗, 또 단속?"
눈은 갓길에 숨어 있을지 모를 단속카메라를 스캔하고, 귀는 네비의 날카로운 경고를 쫓았다. 심장은 끝없는 고속도로 위에서 롤러코스터를 탄 듯 쿵쾅거렸다.
문제는 또 있었다. 네비가 '띵띵!' 울리며 속도 조절을 요구할 때마다, 나는 옆에서 잽싸게 잔소리를 날렸다.
"속도 좀 낮춰! 단속 구간이잖아!"
남편은 "알았어, 알았어!" 하면서도 가속 페달에 발을 살짝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 차 안에는 네비의 경고음, 내 잔소리, 남편의 한숨 소리가 얽히며 삼중창을 이뤘다. 듣다 보니 피곤하기 짝이 없었다.
“당신이 더 시끄러워!" 남편이 농담처럼 툭 던졌다.
"아니거든!"이라고 맞받아쳤지만, 솔직히 누가 더 시끄러운지는 승부가 안 났다.
한편, 미국 하이웨이는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밭과 황금빛 밀밭 사이로 창문을 활짝 열고, 좋아하는 플레이리스트를 틀며 커피를 홀짝인다. 시속 70마일(약 115km)로 크루즈 컨트롤을 켜고 달리는 길 위엔 자유만이 있다. 과속 카메라는 드물고, 내비게이션은 조용히 길만 안내한다.
미국 운전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앱이 있다. Waze라는 실시간 교통 정보 기반 내비게이션이다. 운전자들이 직접 정체, 사고, 경찰 단속, 도로 폐쇄 같은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가장 빠른 경로를 안내해 주는 게 이 앱의 매력이다.
"2마일 앞, 경찰이 있습니다."
부드러운 여성 목소리가 경고음을 내고, 앱 화면엔 빨간 아이콘이 깜빡인다. 운전자들이 실시간으로 올린 정보 덕에 경찰차가 숨어 있는 지점이나 갓길에 세워진 차 위치까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Waze 없으면 반쪽짜리 여행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우리도 미국에서 운전할 땐 꼭 켜놓고 다닌다.
하지만 과속하다가 경찰에 걸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이렌 울리며 뒤쫓아오는 경찰차에 걸리면, 갓길에 차를 세우고 "라이선스 앤 레지스트레이션!" 소리를 들으며 심장이 쫄깃해진다. 떨리는 손으로 운전면허증을 내밀고, 과속티켓 받으며 "Yes Sir” 연발하는 굴욕감은 덤이고, 스트레스는 한국 단속카메라의 무인 저격보다 10배 이상이다. 벌금이 여러분의 상상 이상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한국의 구간 단속이 낫다. 적어도 카메라는 나를 직접 꾸짖진 않으니까.
한국의 '구간단속'은 시작과 끝 지점의 평균 속도를 계산해 얌체 운전자들을 저격한다. 카메라 앞에서만 브레이크 밟고 다시 가속 페달을 꾹? 그런 얕은 꼼수는 통하지 않는다.
작년엔 미국에 사는 친구가 한국 렌터카로 고속도로를 신나게 질주하다 과속딱지 폭탄을 맞았다. 차 반납하고 집에 돌아가자마자 신용카드에서 줄줄이 빠져나간 벌금 내역을 보고 소리쳤다.
"렌트비 다 냈는데 이게 뭐야!"
"구간 단속 때문이야"라고 설명했지만, 내 입으로 말하면서도 첩보 영화 설정 같았다. 이번 여행 중 네비가 "단속구간!”외칠 때마다 친구의 충격받은 얼굴이 오버랩됐다.
궁금해서 알아보니, 이 끊임없는 과속 카메라 단속엔 이유가 있었다. 한국은 국토가 작고, 차는 많고, 인구 밀도는 높다.
예전엔 카메라 앞에서만 살살 달리는 '단속카메라 댄스'가 유행했지만, 사고율은 꿈쩍도 안 했다. 그래서 구간 단속과 이동식 단속이 등장했고, 과속 사고가 상당히 줄었다고 한다. 네비가 실시간으로 단속 위치를 귀엽게(?) 떠드는 것도 이 시스템 덕분이다.
처음엔 네비의 경고음이 내 귀를 테러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건 좁은 한국 땅에서 모두를 지키려는 눈물겨운 사투였다. 생각해 보니, 미국 경찰의 싸늘한 티켓 세례보단 네비의 잔소리가 백배 낫다. 적어도 네비는 내 면허증을 요구하진 않으니까!
그러니 앞으로도 Waze가 "2마일 앞 경찰"이라고 속삭일 땐, 괜히 쿨한 척 말고 브레이크 밟자.
그리고 네비의 '띵띵' 소리도, 서로에게 하는 잔소리도 결국 우리를 지키려는 귀여운 애교라고 생각하자.
이번 로드트립에서 남편이 또 "네비보다 네가 더 시끄러워!"라며 웃는 순간, 우리만의 고속도로 로드무비는 또 한 장면 완성되는 거다.
이런 로드무비를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