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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침개냐

그릴드 치즈냐, 그것이 문제로다.

by Susie 방글이




어느 비 오는 날, 캠퍼스 잔디밭은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우산도 없이 후드티 모자를 눌러쓰고 수업을 마친 나는 축축한 운동화를 끌며 기숙사 식당 (Dining Hall)으로 향했다.


비에 젖은 발끝은 으슬으슬했고, 강의실 에어컨은 괜히 더 차갑게 느껴지던 날이었다.


기숙사 식당 문을 여니, 바깥과는 전혀 다른 따뜻한 공기와 음식 냄새가 퍼져왔다. 늘 그렇듯 토마토 수프는 그날도 어김없이 수프 섹션에 가득 담겨 있었다.


사실 이 수프는 날씨와 상관없이 늘 메뉴에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비 오는 날이면 꼭 그릴드 치즈 샌드위치가 함께 등장했다.


바삭하게 구운 식빵 두 장 사이로 치즈가 쭉 늘어지고, 그걸 토마토 수프에 푹 찍어 먹는 조합. 미국 친구들은 이걸 보면 당연하다는 듯 토마토 수프와 함께 먹는다. 수프를 한 숟갈 떠먹으며, 샌드위치를 수프에 푹 찍어 입에 넣는다.


밖에선 빗소리가, 안에선 학생들 웃음소리가 섞이는 풍경 속에서 따뜻한 국물과 치즈의 온기에 괜히 마음이 풀어졌다.

토마토 수프와 그릴드 치즈 샌드위치 (with avocado)

'아, 이게 미국 애들이 말하는 comfort food구나.'


한국에 살 때, 비 오는 날이면 어머니가 부쳐주시던 부침개가 생각난다.

"비 오는데 부침개나 해 먹자."


그 한마디에 냉장고에 남은 김치, 부추, 양파를 꺼내 부침가루를 풀고, 지글지글 기름 두른 팬 위에 반죽을 올리면 어느새 집 안에는 고소한 냄새가 가득 찼다.

굴 전과 해물전

밖에서는 빗소리, 안에서는 기름이 지글거리는 소리. 그리고 혹시 집에 막걸리라도 있으면 세상 근심이 사라지는 저녁이 완성됐다.


참 재미있다. 같은 비 오는 날인데 한국과 미국이 위로받는 방식은 이렇게 다르다.


한국은 예부터 농사를 짓던 나라였다. 비가 오면 바깥일을 못 하고, 집에 있는 재료로 부침개를 부쳐 먹었다. 기름이 지글거리는 소리가 빗소리와 닮아 마음이 편안해지고, 막걸리 한 잔 곁들여 가족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한국 사람들은 비가 오면 "부침개 먹자"는 말을 자연스럽게 꺼낸다.


실제로 빅데이터에 따르면 7~8월 장마철이면 밀가루와 부침가루 판매량이 평소보다 30% -60% 증가하고, 편의점에서는 장마 초기에 부침가루 매출이 전주 대비 3배 가까이 뛰어오른다고 한다.

심지어 비 오는 날 하루만 놓고 보면 부침가루 매출이 112% 급증하는 날도 있다니, '비 오는 날엔 부침개'라는 말이 농담이 아닌 셈이다. 이쯤 되면 거의 자연의 법칙이다.


반면 미국에서는 토마토 수프와 그릴드 치즈 샌드위치가 대표적인 comfort food다. 사실 비와 꼭 연결되는 건 아니지만, 어릴 적 엄마가 만들어주던 익숙한 맛이라, 생각날 때가 많다.


미국 사람들은 그런 음식을 조용히 혼자 먹으며 마음을 달랜다.


비 오는 날 한국 사람은 부침개를 떠올리고, 미국 사람들은 마음이 쓸쓸하고 집이 그리운 날 'comfort food'를 찾는다.


어릴 적 먹던 마카로니 앤 치즈, 엄마가 구워주던 그릴드 치즈 샌드위치, 혹은 따끈한 치킨 누들 수프 같은 것,

마카로니 앤 치즈 (맥앤치즈)
치킨 누들 수프 (제이홉의 치킨누들 수프가 생각나네 ㅎ)

비가 오든, 기분이 꿀꿀하든, 사람은 결국 익숙한 맛에 기대 위로를 받는다.

다만,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는 사는 곳과 문화에 따라 조금씩 다를 뿐이다.


한국은 본격적으로 장마철이 시작됐다.

오늘 같이 비 오는 날, 나는 부침개를 부칠까, 그릴 치즈 샌드위치를 만들까.


아니면 귀찮으니 라면에 김치라도.


결국, 위로에는 정해진 답이 없다.

오늘 위로는 이 풍경으로도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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