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angSoo Seo Sep 02. 2021

광고주는 촬영장에서 왜 간식만 먹나요?

마케터의 촬영장 체크 리스트




한 번은 촬영장에 못가 본 저희 팀 막내에게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촬영장에 가면 대체 뭘 하냐'는 질문이었죠. 자기가 너무 궁금해서 대행사 다니는 친구에게 물어봤다고 하더군요.


"응. 간식 먹어"


친구의 대답은 그리했다고 합니다. 오, 인사이트 있는 답이네요. 저도 간식하면 빼놓지 않고 집중력 있게 챙겨 먹거든요. 특히 밥차에서 밥만 주는 게 아니라 핸드메이드 수제 간식도 제공한다는 사실 아시는지. 그러니까 소떡소떡은 기본이고 핫도그에 맛탕이며 떡볶이까지! 기회가 되면 언젠가 밥차 먹방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네요.




가지런히 먹히길 기다리는 간식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래서 광고주는 촬영장에서 간식만 먹을 거면서 왜 자꾸 나타나는 걸까요? 저 같은 광고주의 입장에서야 사실 할 말 많은데요. 그렇다고 해서 모든 광고주가 다 촬영장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도 시작부터 종료할 때까지 두 눈 부릅뜨고 앉아있는 악성 광고주는 많지 않죠.


"근데 통신사는 꼭 그러더라고요"

 

통신 3사를 모두 담당해봤다는 광고 대행사 직원의 씁쓸한 증언이 기억나네요. ‘통신사 놈들’이라는 표현을 했던 것도 같아요. 아무튼 유난히 극성인 통신사 광고주(놈들)은 과연 왜 그럴까요. '종특'   겠지만 변명 같은 이유 4가지를 정리해 봤습니다. 정리하면서 보니, 촬영장에서 마케터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네요. 일종의 마케터의 촬영장 체크리스트로 봐주신다면 어떨까요. 그럼 마케터(광고주)는 촬영장에 대체 왜 가나요? 질문에 대한 답을 4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촬영장에선 무슨일을 해야 하나




1. 모든 맥락을 다 전달하기 어려워서입니다


마케터가 대행사에 광고 제작 요청을 할 때는 '애드 브리프'라는 걸 씁니다. '애드 브리프' 안에는 광고의 목적과 요청 배경, 키 메시지와 컨셉, 스토리 구성 등에 대한 가이드와 요청사항이 소상히 적히게 됩니다. 쉽게 말해 용역 발주서라고 보시면 됩니다. 대행사는 그 발주서에 기반해 광고를 제작하는 것이고요.


특히 촬영에 들어갈 때는 어떤 식으로 찍겠다는 콘티는 기본이고요. 심지어 각 시간대별 촬영 장면이 상세하게 적힌 큐시트와 타임테이블까지 공유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 왜 촬영장에 나타나 여러 사람 불편하게 하는 걸까요. 대행사를 못 믿어서일까요?


그보다는 애드 브리프 이면에 있는 맥락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다 광고 대행사에 전달하지 못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한 편의 광고를 확정 짓기까지 내부에선 참으로 여러 단계의 프로세스를 거칩니다. 일단 캠페인급 규모의 광고라면 컵셉부터 슬로건이 정해지기까지의 지난한 보고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팀장-상무-본부장-부문장-CEO 이러한 결재라인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수정하고 보고하고 수정하고 보고하고를 반복하죠.


그래서 이번 광고가 전체 캠페인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정해지고, 어떤 모델을 써서 또 어떤 말을 하게 할지 정해지게 됩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사실상 모든 장면에 합당한 이유가 생기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사람마다 부서마다 추구하는 목표와 방향이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같은 장면을 놓고도 다르게 해석하는 동상이몽이 펼쳐집니다. 쉽게 말에 이번 광고는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운?" 뭐 이런 느낌! 직장인이라면 아시잖아요? 어쨌든 그래도 콘티확정되긴 합니다.


26:30 까지 표시된 타임테이블! 이거 실화냐?!


그러다보니 최종 콘티를 들고 촬영장에서 찍기만 하면 될 것 같지만 지금까지 최소 1개월 이상 준비해온 내부 보고 과정에서의 맥락을 잘 살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이렇게 합리적인 가격에?!”라는 표현이 있다면, 누군가는 합리적이라는 말이 좀 모호하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이렇게 싼 가격에?!”라는 표현을 하면 또 누군가는 싸다는 말이 좀 싼티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겨우 39000원에 다?!”라는 표현으로 갑론을박을 벌이다가 39000원이 특정 조건을 만족하는 고객에게만 적용되니까 그걸 명확히 표현해줘야 한다고 합니다. 그럼 너무 길어지잖아요 @.@


이런 갑론을박이 보고 단계를 거치다가 결국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이렇게 합리적인 가격에?!"라는 표현으로 정해지는 것이죠. 중요한 건 의사결정 과정에서 제기됐던 '우려'들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합니다. 모호한 걸 우려하는 사람이 있으니 자막도 달고, 싸 보이는 걸 싫어하는 우려하는 사람이 있으니 너무 과장된 연기는 금물입니다.


결국 결재라인에 있는 내부 고객들을 줄줄이 만족시키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데요. 최소한 거슬리게는 하지 말아야 할것같네요. 마케터도 직장인이라는 사실 아시죠? 어쨌든 이 사실을 잊고 있다간 “그거 내가 몇 번을 말했는데 그거 하나를 안 하네?”라는 무언의 불편함을 온전히 감당해야 합니다. '어떻게 딱 한 가지를 말했는데, 그 한 가지를 똑바로 처리 못하는 무능한 놈'이 되는 건 한순간 이거든요.


이 모든 히스토리를 일일이 대행사에 전달할 순 없고 그냥 히스토리 저장 봇처럼 해당 내용과 맥락들을 머리에 욱여넣고 촬영장에 가는 죠. 그래도 대부분은 입을 닫고 현장 지휘자인 감독님의 진행에 모든 걸 맡깁니다. 물론 제작 지휘하는 감독님과 CD님은 아무래도 영상의 완성도에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체 흐름상 맥락에서 벗어난다거나 미묘한 뉘앙스를 전달해야 할 때는 조심스레 개입하게 됩니다


가만보자 여기선 맥락이...




2. 돌발상황에서 의사결정을 하기 위함입니다


촬영장에선 돌발상황이 많습니다. 참으로 많습니다. 마른하늘에 비가 오기도 하고요. 민원이 들어와서 촬영이 중단되는 일도 있습니다. 갑자기 등장한 들개 때문에 동시 녹음이 개판이 되기도 합니다. 한 번은 비중 있는 조연 모델이 안 나타나서 제 속이 아주 새카맣게 타 들어갔던 적도 있죠.


어쨌든 이런 돌발 상황에서는 빠르게 결정해야 할 것들이 생깁니다. 갑자기 내리는 비를 배경으로 그냥 찍을 건지 조금 기다리면서 시간이라는 기회비용을 날릴 것인지, 조연 모델을 대체할 모델을 구할 것인지 등등 말이죠. 그거 그냥 현장에서 감독이 결정하면 심플한 거 아니냐 싶지만, 광고는 어떤 장면을 언제 촬영할 것인지 까지 소상히 약속을 한다고 했죠? 위 1번에서 얘기한 것처럼 줄줄이 사탕처럼 보고 과정을 거쳐서 말이죠. 팀장-상무-본부장-부문장-CEO에게 까지 약속했습니다. 중간중간 이해관계가 있는 부서들의 임원들에게도 보고를 하고 코웍을 하는 외부의 이해관계자(예: 애플, 삼성 등)가 있다면 그쪽에도 공유했죠. 톱티어급 모델과 촬영한다면 모델 측과도 자세하게 사전 협의를 한 내용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컨센서스가 이루어진 장면 하나 하나인 것이죠. 그런데 현장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움직인다?


광고주 입장에서야 “나랑 콘티처럼 찍기로 약속한 것이니 그렇게 찍어와”라고만 말해 버린다면, 돌발 상황은 오롯이 대행사에서 떠안아야 하는 리스크 요소가 돼 버립니다. 그렇지만 사실 현장에서는 이 모든 돌발상황에 맞는 더 좋은 대안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죠. 이는 촬영장에 나가볼수록 알게 되는 부분이고, 콘티 회의만 참석한다면 알 수 없는 부분이죠. 그래서입니다. 최선의 결과물을 이끌기 원해서라면 현장에 있어야 하죠. 대행사라는 파트너와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함께 책임을 진다는 의미로 돌발상황에 대처해야 하는 것이죠.

 




3. 히스토리를 기억하는 인간 인덱스가 되기 위함입니다


촬영할 때는 한 장면도 여러 가지 버전으로 찍습니다. 얼마 전에 박하선이 '전지적참견시점'에서 본인만의 연기 노하우에 대한 이야기를 했죠. 감정의 최고 레벨을 10이라고 한다면, 10에서 점점 감정을 낮춰 가며 연기를 한다며 말이죠. 저는 특히 재밌있게 본 부분이니 못보신 분은 꼭 챙겨보시길ㅋ


출처: '전지적 참견 시점' 방송 화면



 “합리적인 가격에?!”라는 표현도 감정을 10에 놓을 수 있고요. 반대로 1에 놓을 수 있겠죠. 맥락상 여기선 6 정도가 적당해 보인다고 연출자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위의 1번에서 살펴본 것처럼 콘티 이면에 있는 히스토리를 보면 어떤 사람은 여기서 4 또는 3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격을 너무 강조하고 싶지는 않아서 인 거죠. 그러다 보면 3~7까지 다양한 감정 범위를 다 찍게 됩니다.


웃는 것도 이가 보이게 환하게 웃는 것부터 모나리자의 웃음처럼 은근하고 고급스럽게 웃는 것까지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액션도 크게 하는 것과 최대한 절제하며 하는 것들이 있고, 앵글도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화면은 4k 이상의 화질로 촬영하며, 필요시 화면을 크롭 해서 확대된 상태로 사용하는 게 현실이죠.  


어쨌든 촬영할 때는 그렇게 다양한 베리에이션이 있을 수 있는데요. 광고를 완성한 후 다시 또 지난한 보고 과정을 거치다 보면 반드시 수정이 필요한 사항이 생기게 됩니다. 현장에서는 이게 맞는 것 같은데 결과물을 보니 좀 아닌 것 같고. TV로 볼 때는 괜찮았는데 모바일로 보면 좀 더 타이트한 앵글이 좋은 것 같고. 뭐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그래서 대안 컷이 어떤 게 있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에 대한 대안 1, 2, 3이 머릿속에 촥 펼쳐진다면 의사결정의 훨씬 수월해질 수 있습니다. 어차피 있지도 않은 컷 가지고 '좀 더 타이트한 게 좋네, 안 좋네' 얘기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그러니까 쉽게 말해, 우리가 어떤 컷을 찍었는지 기억해 내는 인간 인덱스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결과물은 감독님과 CD님이 최선을 다해서 가장 완성도 높게 만들게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어떤 부분을 강조할 것인가. 드러내 놓고 행복한 감정의 끝을 보여줄 것인가 아니면 그거보다는 좀 더 절제하며 고급스러운 감정 상태를 보여줄 것인가는 광고주의 의도에 따라 선택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감정의 완급이라는 것도 참으로 주관적입니다. 어쨌든 그러한 의도를 사전에 알고 있는 사람이 촬영장에 있다면, 의도에 맞춰서 얼터 컷을 충분히 준비하겠지만요.


결국, 다양한 베리에이션의 인덱스가 된다면, 현재의 결과물보다는 좀 더 다른 조합이 어떠냐에 대한 내부 논의가 다소 효율적으로 진행될 수 있습니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시간을 절약해 주는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단순히 의사결정의 지원뿐만 아니라 스스로 최선의 결과물을 내는 데도 큰 도움이 됩니다. 현재의 결과물보다 좀 더 나은 대안이 어떤 게 있을지 효과적으로 생각하며 대안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대안은 과연 어디에



4. 더 좋은 대안을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위 1번에서 맥락에 대한 얘기를 길게 했는데요. 맥락에 맞춰 컷들을 다양하게 베리에이션 해 촬영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광고 감독님이야 트리트먼트 콘티를 놓고 어떻게 하면 영상적으로 완성도를 높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는 데요. 그러한 고민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을지. 상황에 맞춰 추가컷을 더 촬영할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지금 장면을 좀 다른 장소에서 찍을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위 1번의 히스토리를 기억하시나요. 우리는 콘티에 “합리적인 가격에?!”라는 컷만 촬영하기로 약속했지만, 사실 위의 히스토리를 기억하면 “싼 가격에?!” “39000원에?!” 또 따 둘 수 있는 것이죠. 팍팍한 타임테이블 사이에서 무언가 추가로 더 딸 수 있다는 건, 어떤 게 우선순위인지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좋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가지고 현장에서 제작팀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이죠. 그렇게 다양한 얼터 버전을 만들어 간다면, 또 한 번 다양한 게 확장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 수 있습니다.





정리.


지금까지 총 4가지의 이유로 광고주에 촬영장에 가는 이유를 말씀드렸습니다. 아니 뭐 이렇게 힘들게 아등바등 얼터 컷을 찍고 베리에이션을 만드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는 그보다 훨씬 많은 컷을 찍으면서도 광고보다 완성도 높은 영상, 대중을 감동시키는 화면을 만들어 내고 있으니 할 말 없네요.


하지만 그건 아마도 목적이 달라서 인 것 같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 반복적으로 틀어야 하는 광고 특성상 단 1초라도 거슬리는 장면이 있다거나 맘에 안 드는 장면이 있다면, 아마도 반복해서 보일 때마다 여러 명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도 "정답이 없는 건 아닌가요?"라고 묻는다면, 맞습니다. 아마도 하이어라키가 당연시되어 있는 기업에서 광고 또한 하나의 ‘보고서’라고 누군가는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다 보니 결재라인을 따라 피드백을 받고 그걸 반영하고 있으니까요. 사실 내부적으로도 그러한 절차에 대한 비판 의견은 충분히 있습니다. 그래서 해가 다르게 보고 절차나 과정들이 역번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임파워먼트 또한 확실히 확대되고 있는 추세이고요. 그렇지만 아직 갈길은 멉니다.


한 번은 "우와 저 광고 어느 대행사에서 만든 거야?"라고 감탄하며 찾아본 적이 있는데, 우리 회사를 담당했던 바로 그곳입니다. "뭐야! 우리한테는 왜 그러는데?"라고 자조 섞인 농담을 하지만 스스로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좋은 광고는 좋은 광고주가 만든다는 그 단순한 진리를 말이죠. 촬영장에 꾸역꾸역 나가는 이유를 길게 설명했네요.


* 글쓴이의 신간 소개 



매거진의 이전글 [기고]상반기에 놓쳐선 안될 광고 TOP10(해외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