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영진 Nov 30. 2021

당신을 건너 여기, 인디아 1

그때는 미처 몰랐었다







이건 예상했던 그림이 전혀 아니었다.

 

 

머릿수로 세면 지구에서 두 번째, 땅덩어리로 치면 세계에서 일곱 번째.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이며 온갖 스피릿의 종착지이며 신과 인간의 집하장이며 생과 사의 각축장인 동시에 배낭여행자들의 통과의례이자 전공필수라는 나라. 무와 공을 뛰어넘는 깨달음의 성지라고도 하고, 혼돈과 질서가 씨줄날줄로 얽히고설켜있다고도 하고, 개나 소나 심지어 바퀴벌레까지 도반을 삼는다고도 하고, 수도와 쾌락이 하나에 다름 아니라고도 하고, 카르마가 어떻다느니, 억겁이 어쨌다느니, 구원이 뭐라느니, 갠지스와 타지마할이 있고, 간디와 라즈니쉬가 있었고, 샨티샨티와 아유해피, 커리 카스트 크리켓 구루 탄두리 발리우드 등등 오만가지 낯선 것들이 난무하는 땅 인디아((India).

 


옛 이름 봄베이, 인도 최대의 경제중심지로서 가공할 성장세를 거듭하며 전 세계를 향해 그 촉수를 드리우고 있는 무시무시한 저력의 도시, 그야말로 혼돈을 형상화시킨 충격적 대도시 뭄바이(Mumbai)에서 드넓은 아라비아해를 배경으로 장중한 해넘이를 절찬리에 상영한다는 서남부 해변, 히피들의 지상낙원이자 보헤미안들의 유토피아라 일컬어지는 고아(Goa)로 향하는 야간 버스엔 일절 예상치 못했던 정적만이 차게 맴돌았다.

 

 

“무슨 티켓이 그렇게 없어?”


“죄다 고아에서 크리스마스 보내려고 그 지랄들인 거지.”


 

때는 십이월의 삼분지 이를 넘긴 터라 잡으려면 잡힐 듯 바짝 다가온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범국제적인 사랑과 평화, 전지구적인 음주와 가무에 혼신의 힘을 아끼지 않고자 세계만방에서 굶주린 개떼들처럼 몰려든 여행자들로 인해 뭄바이 고아 간 열차는 진즉에 동나버렸고 버스 역시 만석에 만석을 거듭하던 와중 어떻게 겨우 구한 티켓 한 장을 손에 쥐고서 아, 정말이지 우여곡절이랄 수밖에 없는 고난과 분투 끝에 어렵사리 올라탄 버스엔 아무리 두 눈 크게 뜨고 낱낱이 살펴보아도 범국제적이고 전지구적인 여행자는 당최 오리무중, 죄 어디 틀어박혀 양자역학이라도 연구하는지 행방이 묘연했다.

 

 

버스는 풀. 으레 배낭여행자들일 테고 또한 청춘남녀들일 테니 무려 12시간이라는 살벌한 이동거리를 무엇으로 채우겠는가. 응당 이런저런 얘기를 두런두런 나누는 가운데 시원한 맥주를 주거니 받거니 권커니 자커니 해가며 싸구려 우쿨렐레라도 긁어내리며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 “조개껍질 묶어 그녀에 목에 걸”어 보자는 노래를 부르고 자빠졌을 줄 알았다. 푸름이 난발하고 금빛이 찬란한 그 달콤한 개꿈이 첫 여행에 나서 첫 야간버스를 탄 처녀여행자, 서른세 살 잡순 전남 담양 출신의 촌놈 서영진 씨의 예상답안이자 권리장전이었다. 예상은 더없이 완벽하게 빗나갔다. 거무스름한 피부색과 상반하는 유독 하얗고 커다란 수십 개의 눈동자들이 일시에 쏟아져 그냥 잠자코 닥쳐야 했다. 다시 얼어붙었다. 별 수 없었다. 나는 생초짜였으니까.

 

 

아, 버스를 장장 12시간이나 탄다는 건 과연 어떤 것일까? 막걸리엔 신김치와 헛소리와 주먹질을 곁들여야 제맛이라는 촌구석 무지렁이는 한숨 푹 자고 다음날 아침이면 얼추 도착하겠지만 그게 말처럼 쉬울까? KTX 3시간만 타도 몸살 나겠는데? 소박하고 허술하게 우려하는 게 전부였을 뿐 그 이상의 변수는 일절 계산할 수 없었다. 버스는 순도 높은 비포장 길을 달린다는 것을, 그러다 자체결함으로 말미암아 필요이상으로 기다란 휴식을 취한다는 것을, 하여 12시간이 아니라 17시간 만에 도착하리라는 것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모르는 것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전날과 전전날, 생판 처음 보는 아사리판 뭄바이의 후줄근한 숙소침대에서 백발귀신과 머리끄덩이 잡으며 놔, 안 놔, 먼저 놔 드잡이하던 불면의 밤을 연이틀 지속한 탓에 졸도직전의 미약상태에 다다랐음에도 또다시 잠들 수 없었다. 첫 여행이라서, 긴장하고 흥분해서, 아직 육체와 정신의 주파수가 맞춰지지 않아서, 그래서 그런 줄만 알았다. 주변 친구들은 제 앞가림은 물론 부모자식 건사하고 불우이웃도 돕고 불륜도 저지른다는데 나는 스스로가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질병에 다름 아닐 정도로 신경이 예민하고 성질이 까다로워 궁궐인들 제 집이 아니라면 쉬이 잠들 수 없고 수라인들 제 나라의 음식이 아니라면 섭식이 몹시 곤란하다는 사실을 그때는 미처 몰랐었다. 안타깝게도 무식이 장땡은 아니었다.

 








 



으스스, 어째 춥다 싶었더니 버스에 탄 사람들은 모두 뭔가 덮을거리를 두르고 있었다. 황당하네. 아니, 미련하게 이게 무슨? 추우면 에어컨을 끌 노릇이지 뭐 좆발났다고 에어컨을 저렇게 빵빵하게 틀어놓고 이불을 둘러쓰고 있다니? 밍크이불과 에어컨디셔너가 합체 가능한 조합이니? 이런 건 자원낭비니까 음, 일종의 범죄에 좀 가까운 것 아냐? 그건 그렇고 나는 또 어쩌라고? 때에 팍 떠올랐다.

 


“비행기에서 담요 달라고 해서 가지고 다녀.”


“담요는 왜?”


“침낭 가지고 올 거 아니잖수. 버스든 기차든 타면 추와. 에어컨 꺼달라고 해도 절대 안 꺼줌!”

 


인도에서 일고여덟 해째 살고 있는 L양에게 도움을 받은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바보멍청이인데다 닥치면 다 하게 마련이라며 뭘 알려고도 않는 무대책낙관주의자인 내게 티켓을 끊어주고, 호텔을 예약해주고, 수시로 전화를 걸어 설명해주고, 복대 같은 것도 해야 돼? 쪽팔리게 복대는 무슨! 단호히 조언해주고, MSG부족으로 아사직전에 놓이자 돼지고기 두툼하게 썰어 넣은 김치찌개를 끓여주고, 떠나는 길엔 구황식품인 신라면도 챙겨주고, 낯짝만 반반했지 내구성에 상당한 문제가 있는 고국의 오라비가 걱정돼 릭샤왈라에게 신신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린 생판 모르는 사이였는데 말이다.

 

 

여분의 옷 한 벌 없이 배짱 좋게 이국으로 날아든 내게 그 밤 비행기에서 얻어온 담요가 아니었으면 아, 어쨌을까 캄캄하다. 목도리도마뱀처럼 얄궂은 체질 상 한여름에도 겨울이불을 마다않는 인간이니 그 한 장의 담요는 구원에 다름 아니었다.

 


어느덧 외곽으로 진입하자 창밖 가늠할 수 없이 펼쳐진 깊고 짙은 어둠, 보라색 항공담요를 잘빠진 코끝까지 끌어올리고 눈만 껌뻑거릴 뿐 달리 할 말도 할 일도,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어버릴 수도 없었다. 내 안에선 사나운 적요가 소용돌이쳤다. 네 사정이야 내 알 바 아니잖냐는 듯 당최 의미를 추측할 수 없는 스피디한 노래들이 작정한 것마냥 데시벨을 높여 어리바리한 여행자의 달팽이관을 후려치며 강도 높은 고문을 계속하였다. 어이 운전수양반, 거 그러지 말고 슈베르트나 쇼팽 있으면 좀 틀어봅시다, 뭐 그럴 수도 없었다. 옆자리에선 200근은 너끈히 돼 보이는 거구의 노인네가 내 영역을 천연덕스럽게 침범해오며 압사의 위협을 가해오고 있었다. 속편하게 존재와 무의 문화적 상징과 철학적 의의 따위를 탐구하고 있을 형편도 못 되었다. 호기롭게 코까지 드르렁거리며 단잠에 빠져있는 그 볼썽사나운 모습이 사뭇 부러워 돈 주고 사고 싶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까? 뜨겠지, 난데없는 우주대폭팔로 인한 빅뱅이나 안드로메다의 은하계대침공이 있지 않는 이상은. 그런데 그놈의 내일은 언제나 올까? 이놈의 버스는 칠흑의 밤을 무사히 건널 수 있을까? 무거운 정적에 짓눌린 가냘픈 심연은 떠나왔다는 것에 대한 실감, 너무 멀리 왔다는 것에 대한 불안, 혼자라는 것에 대한 허무로 갈래를 쳐나갔다.

 

 

영문도 모른 채 노량진수산시장으로 끌려온 목포도다리처럼 눈만 떴다 감았다, 다시 떴다 감았다, 어느 즈음부터 슬슬 반복이 늘어지는 듯했다. 어느 결엔가 설핏 기억이 흐려졌다 슬며시 흩어졌다.



 

 

 <!--[endif]-->

작가의 이전글 당신을 건너 여기, 인디아 0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