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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진 Nov 30. 2021

당신을 건너 여기, 인디아 2

나는 인도로 간다




 


수면과 불면, 의식과 무의식의 애매모호한 경계를 들락날락 오락가락하는 사이, 익숙한 듯 이물스럽고도 낯선 듯 낯익어 정체파악이 쉽지 않은 어떤 음악 비슷한 소음이 여기와 저기, 혹은 거기, 또는 그 언저리 어딘가에서 나 잡아봐라 손짓하며 소리 높이는 게 감지되었다. 띠리리리 리리리 띠리리리~~


 

이게 뭐였더라? 아…… 뭐였지? 내 마음 나도 몰라 스타일의 남도다방 미스 김처럼 손 한번 잡아볼라치면 뒷짐 지고 도리질하고 에라 말아부러, 양손 주머니에 찔러 넣으면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 참말로 환장하겠네 싶은 그 무엇이 차츰 안개를 거두고 보폭을 넓히며 얼굴을 드러내는가 싶더니 다시금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려는 찰나, 오냐 딱 걸렸다 덥석 움켜쥐자 일순 정체가 명확해졌다. 구닥다리 2G폰! 아니, 21세기 이 대명천지에 어찌 이런 구태의연한 물건이 존속할 수 있단 말인가, 한편 모욕감마저 느껴지는 퇴물휴대폰이 토해내는 조잡한 오케스트라 G 선상의 아리아.



 

눈을 뜨려 하자 골통을 울리는 묵직한 취기가 눈꺼풀 위에 누워 필사의 항전에 들어갔다. 참고 잘까 하다가 버텨봐야 나만 손해라는 빤한 계산에 패배하여 가까스로 눈꺼풀을 말아 올리니 어라? 새카만 어둠. 아니 왜 이 시간에 알람이 울리고 지랄이야 씨부렁대며 음악을 빙자한 소음을 살해하고 재차 이불을 끌어안으려는 순간, 그때였다! 면도날처럼 번뜩 내리서는 날카로운 위화감!

 


가스불 올려놓은 게 생각난 듯 화들짝 놀라 눈을 부릅뜨자 짙은 어둠속에서 맹렬한 혼돈이 덮쳐왔다. 여긴 어디지? 나는 왜 여기서 자빠져 있는 거지? 마구잡이 얽힌 기억에도 지금 여기가 전남 담양군 하고도 남면 지곡리, 그러니까 내가 먹고 자고 사서삼경 읊어대는 내 집이 아니란 건 분명했다. 돌연 지능지수에 문제가 생긴 듯 어리바리 사방을 살피자 전방 45도 각에서 포착되는 조그맣고 새빨간 스위치, 냉큼 다가가 딸깍 누르자 몹시 정육점스러운 불빛이 일시에 퍼져나가는데 그와 함께 팍! 떠올랐다. 여기는 서울특별시 관악구 하고도 신림동 먹자골목 지나 두 번째 갈림길에서 전봇대 끼고 오른쪽에 위치한 View모텔 305호라는 것이. 전남 담양이 아닌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에서 자빠져 있던 까닭이!

 


나는 인도로 간다.

 

 

전장에 나서는 장수처럼 심신의 안녕을 바짝 점검한 후 새벽기운 물씬한 바깥으로 나서자 여행을 시작하려는 자의 설렘이 고까운 듯 십이월의 한풍이 매서운 이빨을 드러내며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국은 눈이 내려 땅이 얼고 수도가 터져 혹한이 더디겠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인도로 간다. View가 하나도 안 좋은 View모텔을 등지고 전봇대와 갈림길과 먹자골목을 거쳐 8차선 대로에 이르자 검다 못해 푸른 어둠에도 불구하고 급물살 몰아치듯 눈에 불을 켜고 이동하는 차량들로 부산했다. 모두들 어제와 같고 내일과 다르지 않을 곳으로 향하겠지만 그러든가 말든가 나는 인도로 간다. 미리 섭외해둔 버스스톱 주위를 얼쩡거리며 담뱃불을 둥글게 감아 손안을 덥히고 있자니 암흑을 가르며 보무도 당당하게 내달려오는 인천공항행 리무진버스, 깊게 들이킨 한 모금 길게 내뱉고 버스에 오르자 예상외로 적잖은 사람들, 누군가는 여행으로 누군가는 출장으로 누군가는 도망으로 길머리를 잡겠지만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인도로 간다. 새벽의 자투리그림자를 밀어내고 희뿌옇게 돋아난 은빛안개가 사방을 대체했다. 내 할 일은 그것뿐이라는 듯 아무런 문제의식도 어떠한 존재회의도 없이 그저 묵묵히 진군하는 리무진버스, 예열에 돌입한 가슴속 엔진은 버스의 가속에 맞춰 슬슬 달음질을 놓았다. 그렇게 얼마, 어느덧 실내등이 빛을 잃었다. 아침이 온 것이다. 이제 나는 인도로 간다.


 







 



인천국제공항을 등지고 찬 공기를 폐 끝까지 들이켰다 내뱉으며 흡사 고종의 마지막 칙사처럼 자못 비장한 각오로 다짐하고 되새겼다. 나는 바보가 아니니까, 응당 있어야 할 무엇이 특별히 모자라다거나 의당 없어야 할 무엇이 각별히 넘친다거나 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일반화된 일이라면 당연히 나도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비록 국경을 넘는 일은 처음이지만 비행기 티켓을 끊는 일도, 비행기 편명을 찾는 일도, 비행기 환승을 하는 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으리라 의심치 않았다. 이건 일도 아니다. 왜냐, 난 바보가 아니니까!

 

 

개전에 임박해 스멀스멀 돋아나는 긴장과 불안을 애써 다독이던 자기암시는 면세점을 통한 눈요기와 장보기로 탄력을 받으며 정도껏 효력을 거두는 듯했다. 이륙 후 5시간 30분이 흐르기 전까진, 경유지인 방콕 수완나폼국제공항을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에라, 이 바보새끼야! 스스로를 저주하며 진심어린 쌍욕을 투척하기 전까진. 뭐 정도껏 효력? 그렇게 안일할 수가 없었다.

 

 

몇박며칠 패키지관광 가는 것도 아닌데 입고 있던 겨울코트를 택배회사에 맡겨버려 코트보다 비싼 보관비를 지불하는 것으로 바보짓의 서막을 열었으나 그 참상을 물론 알지 못하고, 그럴 리 전혀 없음에도 가방에서 마약이 나오면 어쩌나 하는 일절 쓸데없는 근심걱정으로 출국심사와 검문검색을 마친 뒤 오호, 이거 너무 자연스러운데 어쩐데 해대며 아무것도 아닌 일에 홀로 도취되는 한편 재차 삼차 누차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고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휴우, 뭐 대단한 일 했다고 핏기 사라진 얼굴로 해당 게이트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서울상경에 나선 농촌총각처럼 그리 크지 않는 숄더백을 크로스로 붙들어 매고 눈알을 부라리며 사주를 경계하고 있자니 기체 정비점검으로 출발이 두 시간 지연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그러려니 했다. 그러려니 하고 있는 게 촌티를 내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땐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몰랐다. 그저 소고기국밥에 소주 한 병을 맛있게 잡쉈을 뿐.


 

“위스키 가득. 단지 얼음 두 개만.”

 

 

짐작컨대 3.4000피트 상공, 마하 0.87의 속도, 3knot의 풍속으로 꽤나 안정적인 운항이었을 터, 신발을 벗는다거나 자기소개 따윈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미리 숙지하고 있었으므로 차임벨소리와 함께 시작된 기내서비스에 발맞춰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다 않는다는 한국적 마인드에 동참할 마음까진 아니었으나 딱히 할 일 도 없고 흑마술을 연구하기도 무엇하여 위스키를 필두로 블랜디 샴페인 와인 맥주 가지가지 때려 붓고 있자 승무원 아가씨들의 키득거리는 웃음과 소곤거리는 밀담이 빈번히 눈에 띠였다. 마치 저 촌놈 좀 보라는 듯.

 


백주대낮부터 불콰한 낯꼴을 하고 도착한 태국 방콕, 모든 승객들이 빠져나가길 차분히 기다리며 어느 승무원 아가씨를 생각했다. 가위 바위 보에서 졌는지 서열이 말단인지, 아니면 모자란 시골오빠가 생각나 가여웠는지 나를 전담하며 번번이 아몬드안주를 챙겨주던 그 승무원 아가씨에게 사서삼경을 읊어줄 작정은 아니었다. 바라는 것은 담요였다. 퇴장하는 이들의 마지막 꼬리를 여유롭게 물어 마침내 그녀를 마주한 뒤 나이를 쓰레기통에 처박은 아양과 꼬락서니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교태와 저, 저 버르장머리 없는 재롱을 버무려 부탁하자 그게 뭐 대수냐는 듯, 네가 마셔 젖힌 것에 대면 이까짓 것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화창한 미소와 함께 비닐을 뜯지 않은 담요 한 장을 전해주었으니 그 휴머니즘이 어찌 아니 망극할까. 하여 아름다우시네 어쩌네, 이 기분 좋은 비행을 못 잊네 마네, 신의 가호가 깃들길 바라네 바라 마지않네 주접을 떨어대고 있었는데 그때! 기내의 유일한 한국인 스튜어디스는 어디선가 나타나 젠장, 더는 못 봐주겠다는 듯 대화를 토막 내고 물음을 던졌으니 어디 가시냐고, 어딜 가시는 데 이렇게 느긋하시냐고.

 

 

“인도요.”

마치 우리 집에 금송아지 있다는 듯 자랑스레 답하자,


“그런데 지금 여기서 뭐 하세요? 출발했을지도 모르는데.”

뭐, 뭐, 뭐라고? 방금 뭐라고? 띵, 뒷골이 울렸다. 대답이 급박했다.

 

“예? 기다려주는 거 아니에요?”

 


노름판돈을 잃어버린 것마냥 사색이 된 얼굴로 뒷골을 부여잡고 다급히 묻자 한국인 그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한심할 수 있냐는 표정으로, 언제 한번 이런 일이 있을까 몰라 아껴두었다는 듯, 너 마침 잘 만났다는 듯, 덕분에 그 한을 오늘 다 푼다는 듯 정말이지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는 표정으로,

 


“아니, 지금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얼른 뛰어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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