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배움의 주체가 된다는 것
"19세기 학교에서 20세기 교사가 21세기의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주로 과거를 답습하는 학교 교육 현장을 비판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런데 과거의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 과거의 지식을 가르친다고 해서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다. 우리가 살아가며 활용하는 여러 가지 제도와 발명품들은 선현들의 지혜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장 속의 '19세기'를 주목해 보자. 19세기는 1차, 2차 산업혁명이 차례로 일어나며 산업의 형태가 획기적으로 변화한 시기였다. 그 당시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기계화와 대량생산이다. '19세기 학교'는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하여 만들어졌다. 산업혁명 이전의 학교가 교양을 갖춘 시민을 양성하는 교육을 추구했다면, 산업혁명 이후의 학교는 산업사회의 일꾼을 키우는 장소로 정체성이 변모한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학교에 여전히 드리워져 있는 '19세기 학교'의 그림자가 질타를 받는 건, 현대에 중요하게 생각되는 가치와는 멀어진 과거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지속적으로 기계로 대체되어 왔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같은 IT 기기가 발명된 이후에는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정보를 검색하고 습득할 수 있다.
이제 인간의 역할은 기계처럼 앉아서 일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기계들을 활용하는 것으로 변화하고 있다. 심지어 그 기계도 기계가 만든다. 따라서 인간들은 발달된 도구를 활용하고, 저마다 지닌 창의력을 발휘하여 부가가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역량을 쏟아야 한다. 그렇다면 꾸준히 변화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성실함'과 근면성은 여전히 생산성을 가져다주는 가치인가?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성실함과 근면함은 우리가 어떤 일이든 꾸준히 할 수 있는 강력한 기초체력이 되어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예시를 통해 생각해 보자. 매일 아침 일찍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에 출근해서 문을 여는 가게 사장님이 있다고 하자. 이 사장님은 하루 종일 가게를 지키며 커피도 만들고, 계산도 하면서 모든 일처리를 도맡아 한다.
그리고 사장님은 스스로 그것이 최선의 운영방식이라고 믿는다. 성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다함으로써 카페를 통해 벌어들이는 소득을 온전히 혼자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힘든 내색 하나 없이 카페에 출근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성실함은 하루종일 격무에 시달리게 하며, 정작 벌어들인 돈을 쓰면서 인생을 즐길 여유를 빼앗아간다.
그런데 만약 카페 사장님이 생각을 바꿔서, 가게에 주문을 위한 기기인 키오스크를 도입하고, 사람들이 가장 몰리는 시간대에는 음료를 만드는 직원을 고용하면 어떨까? 사장님의 직접적인 노동 시간이 확연히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이 방식이 어느 정도 적응되면, 매장 운영을 전반적으로 관리해 주는 매니저를 고용하여 더 이상 매장에 상주하지 않아도 된다면? 물론 이전보다 가져가는 수익의 비율은 줄어들 수 있다. 대신에 카페가 벌어들이는 전체 영업이익은 증가하고, 사장님이 절대적으로 가져가는 이익은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이 새로운 방식을 상상하고, 실행함으로써 사장님은 자신이 카페 운영에 들이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더 많은 수익을 벌어들이는 방향으로 환경을 개선할 수 있다. 심지어 직원들을 고용함으로써 실업 문제 해결에도 일조했다. 결과적으로 사장님은 성실함이라는 가치에만 매몰되지 않고, 상상력을 발휘함으로써 육체적·정신적으로 여유를 되찾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사고의 전환은 카페나 식당 같은 서비스업에 한정되진 않는다. IT의 예를 들어보자. 최근 Open AI사가 내놓은 chat GPT 같은 '생성형 AI' 기술은 정보 검색의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준다. 만약 이런 도구를 활용하지 않고 그저 '성실하게' 구글 검색으로만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찾으려고 애쓴다면 어떨까? 그 사람은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서도 정확하지 않은 정보들 사이에서 헤매고 있을 수 있다. 앞서 카페 사장님의 예시와 비슷한 결말이다. 성실함과 근면함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태도이다. 하지만 다른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을 무시하고 그것들에만 집중하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제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 '개근상'에 대해 생각해 보자. 어떤 느낌이 드는가? '그동안 내가 속았구나?' 아니면 '이제부터는 조금 느슨하게 살아보자?' 아마도 이런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자책하거나 원망하지는 말자. 성실함과 근면함은 충분히 가치 있는 태도이다.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삶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 준 것이다. 다만, 그 외에도 내가 지닌 다른 능력들을 동시에 활용할 수 있어야 성실함이라는 가치가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을 기억하자.
최근의 학교를 보면, 학생들이 예전만큼 개근상에 목숨을 걸지 않는 변화를 관찰할 수 있다. 과거에 비해 조퇴를 하거나 결석을 하는 데 훨씬 심리적 저항이 적은 느낌이다. 아마도 개근상을 받기 위해 숱한 고통을 참아왔던 부모 세대들이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노력이었는지를 알기에, 자녀들에게는 그런 고통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선택들이 모여 이루어진 변화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이러한 인식의 전환이 급속도로 이루어지는 반면, 제도의 개선은 더디다는 것이다.
교사들은 교육과정 문서에 적힌 내용에 따라 필수적인 내용들을 포함해 교과과정을 구성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진도가 항상 빠듯하다. 결석한 학생을 기다려줄 시간적 여유는 없다. 그리고 결석한 학생이 그 내용을 다시 들을 방법이 마련되어 있는 학교는 드물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수업에 빠진 학생들은 교과 지식의 결손이 생기기 마련이다. 국가의 경제가 발달하고 많은 예산이 투입되면서 교육 기관의 물리적인 환경은 상당히 개선되었지만, 수업에 빠진 학생이 치러야 할 대가는 과거에 비해 크게 변하지 않은 것이다.
외국 사례를 살펴보자. 영국 레이스턴에 있는 대안학교인 서머힐 스쿨은 많은 면에서 자유로운 학교다. 그중에서도 특히 출석에서 아주 자유롭다.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수업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지 않아도 된다. 서머힐 스쿨의 교사들은 학생들이 각자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집중하도록 존중해 준다. 그러다 보니 수업이 진행되는 시간에 어떤 학생들은 나무를 타면서 놀고, 다른 학생들은 물놀이를 하면서 놀고 있는 풍경을 자연스럽게 목격할 수 있다. 교사들은 수업 시간에 교실을 홀로 지키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그렇게 놀기만 하던 학생들은 어떤 시점을 지나면 수업에 스스로 들어온다고 한다.
학생이 스스로 들어왔다는 것은 배움의 주체가 되었다는 뜻이다. 학습의 주체로 성장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공부를 늦게 시작하면 학문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세상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의 직업과 성향은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이다. 대신, 어린 시절에 자신이 원하는 사회적 욕구와 놀이의 욕구를 긍정적인 방법으로 해소한 학생들은 안정적인 정서를 지닌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많은 사람들이 개근상을 가지고 있고, 교육열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치열하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지만, 그것에 비해 행복지수가 크게 떨어진다. 공교육과 대안교육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적어도 서머힐의 졸업생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우리 사회의 모습이 대조된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아가며 경제적으로는 부유해졌지만, 그것이 행복과 정비례하지는 못한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에는 꽃피우지 못하고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학생들이 너무나 많다. 그리고 우리의 교사들은 그 어떤 나라의 교사들만큼이나 훌륭한 전문성을 지니고 교직 생활을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자부심이었던 능력들은 출석을 독촉하고 민원을 처리하는 행정업무에 시달리며 점점 시들어간다. 학교에 꼭 나와야 하는 압박감에 의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비단 학생들만의 일은 아닌 것이다.
학교에 나오기 싫어 힘들어하는 학생들, 그리고 그 학생들을 억지로 학교로 끌고 와서 수업을 진행해야 하는 교사들로 이루어진 학교는 학습의 공동체라는 의미를 살리기는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더 늦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 하지 않을까? 우리 대한민국이 그동안 비약적으로 성장했던 과거에 학교의 역할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드리웠던 그늘이 무엇이었는지를 반추해 보면서 말이다.
- To be cotinu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