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읽었다옹

by 수상한호랑이

나는 이 마을에 태어나기가 잘못이다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나는 무서워 오력을 펼 수 없다

자 방 안에는 성주님

나는 성주님이 무서워 토방으로 나오면 토방에는 디운구신

나는 무서워 부엌으로 들어가면 부엌에는 조앙님


나는 뛰쳐나와 얼른 고방으로 숨어버리면 고방에는 또 시렁에 데석님

나는 이번에는 굴통 모퉁이로 달아가는데 굴통에는 굴대장군

얼혼이 나서 뒤울 안으로 가면 뒤울 안에는 곱새녕 아래 털능구신

나는 이제는 할 수 없이 대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대문간에는 근력 세인 수문장


나는 겨우 대문을 삐쳐나 바깥으로 나와서

밭 마당귀 연자간 앞을 지나가는데 연자간에는 또 연자망 구신

나는 고만 디겁을 하여 큰 행길로 나서서 마음 놓고 화리서리 걸어가다 보니

아아 말 마라 내 발뒤축에는 오나가나 묻어다니는 달걀구신

마을은 온데간데 구신이 돼서 나는 아무데도 갈 수 없다




2025.9.30. 어딜 가도 보이는 것은 옹기종기 모여있는 기억의 파편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적막강산」 - 백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