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속가능 스튜디오 Feb 04. 2017

남편의 시간, 남편의 갭이어

사실 백수도 갭이어도 아닌 그만의 시간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그이가 온라인에서 배우자 동반 휴직을 내고 해외에 나와있다고 하면 다들 '남편이 외국에서 뭘 하시냐'고 묻는단다.

그럴 때마다 "저는 남편은 없고 부인이 공부하러 와서 같이 왔다"고 대답하는 나의 남편. 그러면 다들 신기하다거나 거기서 뭘 하느냐 또다시 묻는다.


나는 남편이 일종의 '갭이어(Gap year)'를 보내고 있다고 말한다. 때로는 '휴직'을 했다고 말하고 때로는 '나의 학업을 지원해주러 함께 왔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중에 어느 하나 정확히 맞는 말은 없다.

*갭이어(Gap year)란 학업이나 일을 잠시 중단하고 여러 활동을 체험하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의 흥미와 적성을 찾고 앞으로의 진로를 설정하는 기간


남편은 '갭이어(Gap year)'라는 영어 단어가 이질적이라 그 뜻이 딱 와 닿지 않는단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이 곳에서 보내고 있는 시간은 무엇이냐 물으면 남편은 딱히 설명하긴 힘들지만 일종의 인생의 틈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고 대답한다. 그렇지만 이런 질문과 대답은 그저 우리 사이에 떠도는 대화일 뿐이다.


보통은 생각보다 말이 빠른 내가 대답한다. 나의 남편은 휴직을 하고 나와 함께 이 곳으로 와 일종의 갭이어를 보내고 있다고. 그럼 다들 대충 이해한 것처럼 보이고 쉽게 다른 화두로 넘어갈 수 있다. 나는 끊임없이 남편의 시간을 설명하려고 한다. 어쩌면 나는 남편이 백수처럼 보이는 것이 두려워 그의 상태를 끊임없이 설명하는 것이리라.


도리어 남편은 매우 여유롭다. 아침에는 조깅을 나가고 낮에는 스웨덴 할머니들과 즐거운 담소를 나누러 스웨덴어 수업에 참석하며 저녁에는 장을 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남편은 조급하지도, 그렇다고 한가하지도 않다. 그는 시간계획표를 짜면서 즐거워하고 자신의 시간을 채워나갈 일을 스스로 결정하는데 만족한다. 


조급한 것은 오히려 나. 나는 남편이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우기를, 학생 또는 직원, 그 뭔가라도 자그마한 지위를 얻기를 바랐다. 나는 그의 시간을 허울 좋게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사실 물어보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말이다. 



아침 8시 30분 기상, 아침 식사

아침 10시, 강변 조깅

아침 11시, 글쓰기

오후 1시, 점심식사

오후 2시, 스웨덴어 회화 교실

오후 5시, 장보기

오후 6시, 저녁 식사

오후 7시, TV 보며 설거지

오후 8시, 영어 공부

오후 9시, 컴퓨터 게임

오후 10시, 독서

오후 12시, 취침


남편의 목요일 생활계획표이다. 남편은 매일 조금씩 다른 일을 하고 조금씩 다른 여가를 즐기며 나름의 생활 템포를 가지고 있다. 자신의 일상에 만족하고 크게 새로운 일을 계획하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자 하는 욕심도 없다. 그렇지만 동시에 새로운 일이 생기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없고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피하지도 않는다. 지금 남편은 억지로 무엇을 해보려 노력하지 않지만 억지로 무엇을 안 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일을 시작해 7년간 같은 일을 하고, 큰 변화 없는 환경 속에서 살아온 남편. 남편에게 지금 시간은 일종의 일탈, 나름의 견문을 넓히는 시간, 마지막으로 쫓기지 않는 시간이다.


조급하지 않은 그의 시간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그의 시간이 나는 부럽다. 혹은 시간에 대한 남편의 태도가 부럽다. 


'시간'에 쫓겨, '시간'을 쫓아, '시간'을 아껴 아껴 쓰는 날들. 때로는 내가 시간을 쓰는 것인지 시간이 나를 쓰는 것인지 모르겠다. 내가 시간에 쓰이고, 소모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시간에 쫓기지도, 시간을 쫓지도 않는 그런 날들이 내게도 올까 싶다.


지금 남편은 백수의 시간도, 갭이어도 아닌 그만의 시간을 걸어가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속도가 다른 부부가 함께 살아가는 방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