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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속가능 스튜디오 Feb 27. 2017

한국인 유학생으로서
한국 사회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한국은 어때?'라고 묻는 질문에 대답할 때 생각해보아야 할 것들.



  스웨덴에 사는 지금만큼 한국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처음 스웨덴에 왔을 때 한국에 대해 잘 모르는 외국 친구들이 한국은 어떤 곳인지 물어보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스웨덴 생활 초반, 별생각 없이 편하게 한국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는 그 대화에 대한 나의 책임감을 인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일이 터졌다. 한국이 이렇게 유명해질지 처음에는 몰랐다. 점점 학과 친구들부터 교수님들까지 한국에 무슨 일이 있느냐, 한국은 어떤 곳이냐 더 깊이 있는 질문들을 나에게 던져댔다. 외국에서 한국의 정치, 사회 문제에 대해 이렇게까지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어본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우리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어야만 했던 시기가 있었다. 이 시기를 거치며 '한국은 어떤 곳이냐'란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이 가지는 무게와 의미를 깊이 있게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한국'에 대해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내가 한국인이라고 해서 우리나라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내가 한국인 전체를 대표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지만 가끔은 어쩔 수 없이 내가 한국인 대표, 우리나라의 얼굴이 되어야 한다는 것.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가만 생각해봤을 때 나 말고는 한국인이 한 명도 없는 우리 학과에서 내가 말하는 우리나라에 대한 이야기 모두가 '한국의 이미지'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이야기에 대해 무거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 견해가 한국인 모두의 견해가 아니며, 내가 보는 한국이 객관적인 우리나라의 모습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말을 이어가야 한다.


  한 번은 내가 한국에서 직장 생활했다는 것을 안 친구가 우리나라의 워크 라이프 밸런스에 대해 물어온 적이 있다. 나는 당연하게도 스스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야기하다 보니 내 생각에도 나의 경우는 너무나 극단적이다. 나는 매일 새벽까지 일하고 주말에도 쉬지 않는 PD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모든 PD가 이렇게 일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내가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는 나의 경험을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내 경험을 재미있게 이야기했지만 점점 충격을 받는 친구들의 얼굴을 보며 이것이 매우 극단적인(extreme) 경우라는 것을 제대로 설명해야만 했다.



나도 모르게 한국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은가?

  몇 명의 한국 친구들과 함께 외국인 친구를 만난 적이 있었다. 한국 사람이 더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우리나라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흘러갔다. 나는 말을 하기보다 듣는 입장이 되어 대화에 소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때 느낀 것이 나를 포함한 우리가 주로 한국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많이 한다는 것이었다. 외국인 친구가 '한국에서 직장 다니는 건 어때?'라고 물으면 '힘들지, 매일 야근하지, 직장 안에서 위계질서가 엄격하니까 직장 상사 눈치 봐야 되지, 힘들어 힘들어'라고 다 함께 입을 모아 대답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친구들 중 절반은 직장에 다녀보지 않았다. 그리고 내 경우에 물론 직장 생활이 굉장히 힘들었긴 했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엄격한 위계질서, 꼰대 같은 직장상사 때문에 고통받은 경험은 별로 없다. 하지만 우리는 남에게 들은 이야기 혹은 미디어를 통해 각인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쉽게 내면화시켜 사회를 비판, 혹은 '비난'한다. 나 또한 스웨덴에 살며 이런 식의 대화를 꽤나 많이 해왔는지도 모르겠다.


  스웨덴에 살면서 스웨덴의 훌륭한 사회 시스템과 복지제도에 대해 공부하고 때로는 직접 경험하며 우리 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더 커지기도 한다. 항상 '와... 여기는 어떻게 이러지?'라고 생각하며 '이래서 한국은 문제야'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한국과 스웨덴을 비교하는 데에는 어리석은 면이 있다. 스웨덴은 1932년부터 오랜 기간 사회민주당이 집권하며 스웨덴 사회 복지제도의 기초를 탄탄하게 쌓아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난, 정치적 내분으로 인한 와해, 세계 2차 대전 당시 참전 여부에 대한 격렬한 사회적 논의 등 대내외적으로 많은 어려움들을 겪은 깊은 정치 역사가 있다. 그들의 정치 역사를 보면 항상 잘 해왔던 것도, 항상 완벽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려운 와중에도 알빈 한 손, 올로프 팔메와 같은 훌륭한 총리들이 탄생했고 그들이 많은 부분에서 반대파들과의 정치적 대화, 협치를 꾀하며 지금의 사회 시스템의 기본을 조금씩 쌓아 올려나간 것이다. 이런 오래된 정치적 역사를 모두 무시하고 지금의 스웨덴과 한국의 사회 시스템을 비교하며 '우리나라는 멀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성급하다.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는 짧고 어쩌면 조금 다르며 아직은 더 나아가고 있는 과정에 서있다. '우리는 영원히 헬조선에서 벗어나지 못해.' , '한국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라고 단정하기에 아직 우리는 뭘 많이 해보지도 못한 것은 아닐까.



오히려 스웨덴에서 받은 위로와 격려의 말들

  스웨덴에서 만난 중년 부부인 세실리아, 닐스와 우리나라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이런 생각과 고민이 더욱 깊어졌다. 그들이 나에게 한국에서 일어난 정치 스캔들에 대해 물어왔고 나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종국엔 '답답하다'란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주의 깊게 내 이야기를 듣던 닐스가 되려 나를 위로했다. 


"어디에든, 어느 나라에든 부패가 있어. 스웨덴에도 정치적인 부패가 일어나고 있어. 다만 그런 일들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앞으로 어떻게 바꾸어나가느냐에 따라 오히려 그런 일이 나라를 발전시키는 동력이 될 수가 있어. 철저하게 조사하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성찰하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회 시스템을 발전시키는 것이지.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


  닐스의 위로를 받으며 스스로 민망해졌다. 한국은 '노답'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한국인으로서 얼마나 무책임한 발언인지에 대해 스스로 깨닫게 된 것이다. 그의 말대로 '문제'는 어디에든 있고 그 '해결' 또한 어디에든 있지 않을까. 되려 스웨덴인에게 들은 이런 위로의 말은 실제 위로가 되었다기보다 나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답답하다', '절망이다' 말하기 전에 나 스스로 뭔가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먼저 생각하고 이야기한다면 이런 위로나 격려보다 더 건설적인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좀 더 '지독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외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한국에 대해 좋은 것만 이야기해야 할까? 그건 분명 아닐 것이다. 다만 한국 사회의 변화를 위해서는 비난보다는 건강한 비판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비판은 때로 '지독하고', '집요해질' 필요가 있다.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고 그 이슈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올 때 우리는 아주 뜨겁게 분노한다. 이 분노는 우리 사회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이 문제들의 뿌리까지 탈탈 털어낼 정도로 강력한 힘을 발산하기도 한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한국 시민들의 힘'이다. 나는 이러한 시민들의 힘이 참으로 자랑스럽고 실제로 외국 친구들과 대화할 때 이 부분을 강조해서 말하곤 한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함을 느낀다. 우리가 강하게 분노하는 이 문제가 정리되고 난 후, 모두들 이 시기를 잊어버리지는 않을까. 나 스스로부터 한국 사회의 문제를 잊지 않고 건강한 비판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시간이 흘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이슈가 천천히 식어가도 우리는 이것들을 그냥 지나가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지독하게 때로는 집요하게 이슈와 문제들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고 추적하고 감시하고 또 토론해야만 한다.


화가 난다, 거지 같다, 답이 없다, 역시 헬조선이다, 절망이다, 떠나자,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스웨덴에 살고 있는 내게 '돌아오지 마라', '돌아와서 뭐하겠니', '여긴 답이 없어'라고 말하는 친구들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나는 우리나라로 돌아가고 싶고 내가 돌아갈 한국이 조금은 더 나은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좀 더 지독해지고 끈질겨질 필요가 있다. 내가 스웨덴 사람들에게서 배운 것이라면 바로 절대적인(상대적이지 않은) 비판의식, 시민들의 철저한 감시, 생활 속에 박혀있는 토론 문화이다. 외국인인 내가 보기엔 충분히 좋은 복지제도와 사회 시스템도 그들에게는 항상 감시 대상이 되고 토론 주제가 된다. 부끄럽지만 때로는 어떤 문제에 있어서든 끝까지 '왜' 그러한지를 파고드는 그들을 보며 피곤하겠다, 생각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 사회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더 나아져야 한다고 믿는 스웨덴 사람들의 끈질김을 꼭 배우고 싶다 생각하기도 한다.


더불어 우리나라도 얼마든지 더 진보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우리가 사회 문제에 대해 빠르게 분노하고 쉽게 잊기보다는 지금의 문제를 끝까지 놓지 않고 계속 토론한다면 말이다. 어떻게 보면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엄청나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지금처럼 모두가 정치에 대해 뜨거운 관심을 가졌던 적은 없었다.(나 또한 전에는 이만큼 정치 문제에 관심이 많지 않았고) 우리가 지금처럼 건강한 비판과 토론을 이어나간다면 결국 우리 사회에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스웨덴에 살아도, 나는 여전히 한국인이라는 사실.

  요즘 들어 우리나라에 대한 뉴스를 많이 본 외국 친구들 중 "한국에 돌아가지 않고 여기서 계속 사는 게 낫지 않아?"라고 말하는 친구들이 생겨났다. 처음엔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그럴까?"하고 웃고 말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여기서 사는 것도 좋겠지만 한국에 들어가서 뭔가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기도 해. 사실 한국이 뉴스에 나오는 만큼 살기 힘든 나라는 아니기도 하고."라고 조금은 진지하게 대답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전보다 조금은 진지하고 비장한(?) 사람이 된 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분명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보다 우리나라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 것만은 사실이다.


스웨덴에 살며 나는 자의든 타의든 우리나라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떨어져 있다 보니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 것 같기도 하다. 한국에서의 나와 스웨덴에서의 나는 분명 매우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누군가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벗어나 속 편한 유학 생활하더니 그런 태평한 소리를 한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한국인으로서 끊임없이 우리 사회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노력한다. 누군가 우리나라에 대해 물었을 때 '나도 잘 모르겠어 허허'라는 무책임한 말은 하지 않겠다 생각한다. 사실 그러다 보니 더욱 내가 하는 말에 대해 책임감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하는 건지도 모른다. 스웨덴에 살든 어디에 살든 나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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