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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stain Life Aug 19. 2015

한옥살이, 소소한 이야기

도심 주거형 개량 한옥의 어느 세입자 3




우리집 맞은편 이웃엔 노부부가 살고 있다. 쓰레기를 내 놓거나 집을 나설 때 아흔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와 어쩌다 마주치면, 할아버지는 쩌렁쩌렁한 서울 사투리로 말을 걸어 오곤 한다. 골목 일대의 집들이 한 세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어림잡아 열댓번은 들어온 얘기다. 


형식적인 짧은 대화가 오간 뒤 각자 집으로 들어가 대문을 걸어 잠그고 나면 방금전 만남은 없었던 일처럼 그저 순간으로 증발되고 만다. 내가 늘 아쉬워 하는 부분이다. 


골목 끝으로 숨겨진 우리집 대문은 할아버지 집의 것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한옥은 어마한 규모다. 할아버지 댁에 가본 일은 없지만, 고양이 미셸이 지붕 위로 용마루를 타넘고 드넓은 세상과 교감하려던 차에 뒷 목덜미를 잡아 채 돌아오던 어느 어스름한 밤, 달빛 너머의 풍경으로 할아버지의 드넓은 기와집이 내려다 보였던 것을 기억한다.


할아버지는 고령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매일 대문 밖으로 나와 기둥에 붙은 전기계량기의 십만단위 넘어가는 숫자판을 꼼꼼히 체크한 뒤 종이 위로 기록하거나 헐겁게 채워 놓은 쓰레기 봉투 안으로 자신의 쓰레기를 끼워 넣는 등 스스로의 일상을 엄격하게 꾸려 가며 건재하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할아버지를 마주할 수 있다는 안일감에서 일까, 할아버지의 한옥집에 들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은 소망은 말이 쉬울 뿐 쉽사리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은 채 벌써 4년이나 흘러버렸다.


할아버지의 증언대로 지은지가 80년이 지났다 함은, 이 골목의 밀집한 한옥들은 1930년대 건축된 도심 주거형 개량 한옥의 영향권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이 집 또한 당시에 작은 필지의 단위로 어느 세대주에게 분양되어진 것일 테다. 물론, 그보다 더  오래전에 이 터에서 살았을 왕조시대의 누군가를 방정맞게 상상해 본 적도 있다. 단순한 추측으로 궁궐에  출퇴근하던 중인 신분의 그 어느 누군가를 말이다. 오래된 집의 힘이란 이런 것일까. 집 터와 공간에서 풍겨오는 분위기만으로도 이런 저런 상상을 하게 되니.



합판을 붙여 천장을 편평하게 개조한 실내공간에서는 노출된 한옥의 서까래를 볼 수 없지만, 대문으로 난 작은 현관 위로는 유일하게 서까래가 드러나고 있다. 현관 바닥으로는 서까래를 받치고 있는 진흙 더미에 난 틈으로 서서히 부서져 내리는 먼지가 소복이 쌓이곤 하는데, 약 한 달을 주기로 대대적인 비질에 고운 흙가루를 쓸어 내야만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아무렴 어떠랴. 오래된 집에서 흙도 좀 떨어지고 비도 약간 셀 수도 있는 노릇인 것을. 


청소를 위해 1년에 한 번 뚜껑이 열리는 정화조의 맨홀은 여전히 유효하다만, 희한하게도 하루에 어김없이 어느 한 때에 맨홀 위로 고양이들은 배를 깔고 휴식을 취한다. 아마도 맨홀의 차가운 금속 성질이 고양이들을 유혹하는  듯하다. 아니, 뚜껑 사이로 풍겨져 나오는 꾸릿한 향취 때문인 것일까. 뭐, 내 알바 아니니 알아서들 편하게 계시고.  



앵글로 선반을 짜 건넛방 벽체에 고정한 수납공간은 이전에 이 집에 머물렀던 누군가의 흔적이다. 앵글 사이로 철사를 꼬아 넣어 손수 제작한 행거 또한. 집의 대문을 열어 젖히는 순간, 가장 먼저 시야에 포착되는 생활의 흔적.



골목길 가장 안쪽, 마치 도시의 요새처럼 고요하고 아늑한 이 공간은 서울 도심의 한 가운데에서 보기 드물게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한, 혹은  멈추어진 듯한 착각을 자아내게 하는 곳이다. 해가 뜨는 아침을 기점으로 'ㄷ'자 공간을 부채꼴 모양으로 비추어주는 태양빛, 그리고  그 빛을 쫓아 포착한 오후의 어느 한 때.








근황이라 한다면, 피아노 책상이 생겼다. 장마가 한창이던 늦은 밤에 으슥한 골목길에서 발견한 버려진 가구를 주워 오고야 말았는데, 샤시문을 칠하고 남은 페인트로 외관을 다듬으니 이 공간과 잘 어울려 있는 듯하다. 덮개를 열어 상판을 고정하고 책상으로 쓰는 일은 없지만, 서랍장으로는 잡동사니들이 벌써 꽤나 많이 들어서 있다.



주방 옆으로 맞붙은 한 칸. 싱글 침대와 옷장 하나 들어가면 꽉 차는 크기의 방이다. 실제로 처음 이곳으로 이사 왔을 당시 이 방을 침실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으나, 고양이가 침대 위를 점령해 가자 비좁은 공간감을 견뎌내지 못하고 안채로 옮겨간 것이 벌써 오래전 일이다. 현재는 책상 하나 덩그러니 놓아두고 그때 그때 활용 중.


이 공간 또한 벽지로 수십 겹 덮여있던 곳이었는데, 주방공사가  마무리되어 갈 무렵의 어떤 여운으로 한쪽 벽 면을 드러내게 되었다. 뜯어낸 벽지 조각이 100L 쓰레기 봉투를 꽉 채워갈 무렵, 서서히 드러나는 흙벽 위로 얇은 한지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한자가 빼곡히 적힌 활자본의 파지였던 것이다! 누군가 머무르며 남겨온 생활의 흔적을 도려내고 있는 당시의 순간에는 과거의 옛날 사람에게 송구한 마음이 들기도 했던, 오래된 집의 냄새가 가장 많이 풍기는 공간이기도 하다.




화원으로 변해버린 듯한 여름날의 주방 풍경.



변화가 있다면, 그동안 방치한 타일 사이의 틈이  메꾸어졌다는 것. 사실, 평생 계획에 없는 일일  듯했으나 중요한 손님의 방문이 임박하자 부랴부랴 철물점에서 백시멘트 사다가 속성으로 작업을 하게 되었다. 다시 한 번 느끼는 바이지만, 벽이나 바닥에 예쁜 타일이 하나씩 붙어 나갈 때 발생하는 시각적 쾌감에 비해 정돈하고 마무리 지을 때의 육체적 노고가 미적 카타르시스를 상쇄시킬 정도이니, 쉽지 않은 일이다. 하하.



마트에 고양이 사료 사러 들렀다가 유유히 카트를 밀며 진열된 수많은 상품 사이를 어슬렁 거리던 차, 시야에 포착된 파스텔 톤의 컵. 당연히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닐 테지만 미래의 어느 날을 위하여, 실은 시각적 만족감을 위하여 깔별로 간택된 머그컵. 실용적 목적은 그렇다 치고, 시각적인 쾌감은 퍽이나 잘 전해져 오고 있는  듯하다. 혹시 알 길 있나. 예닐곱 명의 손님들이 단체로 방문해 티타임을 갖게 될 날이 곧 닥치지는 않을지.



미셸은 사료를 바꾸고 나서  1Kg가량 살이 올랐고, 아마 덩치도 더 커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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