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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stain Life May 08. 2021

차가 흐르는 시간

장보현의 <일상, 이상> x 29cm WEEKLY ESSAY




얼마 전 저녁 식사를 위해 모처럼 소고기를 구웠다. 남편과 나 사이의 단출하지만 호화로운 저녁상이었다. 남편은 소고기를 구울 때마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가족이 떠오른다고 했다. 특별한 날에만 맛볼 수 있던 얇은 냉동 삼겹살에서 시작된 만찬의 파노라마는 두툼한 생삼겹살을 거쳐 소고기까지 이어졌다. 냉동 삼겹살을 구워 먹던 시절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뒤였다. 고기를 뒤적이는 집게는 어머니와 아버지에서 성년이 되어가는 자식들의 손으로 서서히 넘어갔다. 


두 살 터울의 남편과 나 사이에는 흘러간 동시대를 향수하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생활수준의 향상에 따라 식탁 위의 만찬이 냉동 삼겹살에서 생 삼겹살로 넘어간 변화상은 충분히 공유할 수 있었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내 경우, 대학 시절 서울로 유학을 오게 되면서 고향에 있는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게 된 것이다. 마음의 거리 또한 시나브로 벌어져 갔다. 한 번쯤 부모님을 위해 손수 소고기를 구워야 할 그 시기에 나는 독립을 핑계로 프랜차이즈 커피숍을 전전하고 있었다. 


나는 가족에게 아직도 손수 상을 차려 준 적이 없다. 부모로부터 독립을 하고, 반려자를 만나 한 가정을 꾸린 뒤 내 집을 오고 간 사람들에게 한 상 가득 내어주는 일은 허다했음에도 말이다. 그건 스스로의 건재함을 드러내기 위해, 아마도 내가 이렇게 잘 살아가고 있음을 과시하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였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야 마음이 편했다. 손님들이 돌아가고, 소복이 쌓인 설거지 거리에 비누 거품을 문지를 때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마치 시지프의 형벌에 갇힌 듯, 하루에도 서너 번은 거뜬히 상을 차리고 또 차리기를 반복했다. 매일 차려 먹는 반상은 물론, 제철 과일을 맛보기 위한 다과상, 특별한 날의 잔칫상,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뱃속 아이의 건강을 기원하기 위해 삼신상까지 차렸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어머니의 밥상을 젖줄 삼아 서로 머리를 맞대고 타액을 공유하며 진정한 의미의 식구가 되어갔다. 나는 매일같이 아버지의 노동과 어머니의 뒤치다꺼리로 쌓아 올린 밥상머리에 앉아 그토록 사소한 일상의 통과의례를 거쳐 지금의 내가 되었다. 


지금 내가 여기에 잘 살고 있는 것은 나의 가족이 베푼 내리사랑의 수혜를 듬뿍 받은 까닭이다. 어디서 배운 적 없지만 본능적으로 깨닫고 체화하는 일상의 가르침. 그것은 또한 타인을 환대할 줄 아는 선순환의 연결 고리다. 


최근 아버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기억력이 부쩍 감퇴되었다며 대학 병원의 정신건강의학과를 스스로 찾아 진단을 받았단다. 과로로 염증 수치가 오른 어머니를 데리고 입원 수속을 밟고 나오는 길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간단한 인지 능력 검사를 마치고 뇌 질환의 정확도 파악을 위해 MRI 촬영을 앞두고 있었다. 나는 그 길로 냉동실에 쌓인 온갖 먹거리를 백팩에 가득 챙겨 시골집으로 향했다. 언제고 들이닥칠지 모를 손님을 위해 늘 구비해 둔 식재료였다. 집에서 홀로 나를 기다리던 아버지는 아직 점심 식사 전이라며, 인근 식당에 나가 대충 때우면 된다고 말했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챙겨온 것들을 주섬주섬 꺼냈다. 꽁꽁 얼어붙은 식재료는 적당히 녹아 있었다. 나는 유년 시절 부모의 보살핌 아래 놓인 미성년의 신분이 아닌, 남들에게 나의 생활 방식을 적당히 과시할 줄 아는 한 주체로서 아버지의 점심상을 차렸다. 입맛이 없다며 부쩍 야윈 아버지는 내가 차린 밥상을 깨끗이 비웠다. 


검사 결과는 지극히 정상이었고, 이틀간 병동에 입원해 있던 어머니 또한 내가 내려간 그날 퇴원 수속을 밟았다. 아버지의 검진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나의 오른쪽 옆구리와 등엔 붉은 반점이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랐다. 때마침 병원에 있던 나는 신경과에 들러 대상 포진 진단을 받았다. 수납 창구의 징수원은 온 가족이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며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없이 사랑하기에 그 사랑의 크기를 차마 가늠할 수 없으므로, 사랑의 마음을 감히 표현하지 못하는 가족의 존재. 그간 가족에게 퍽 무심했던 나의 과오가 주홍글씨 마냥 등줄기와 옆구리를 타고 형벌로 새겨진 듯했다. 


남편이 소고기를 구울 때마다 가족이 떠오른다고 했듯 나는 ‘차’를 내려 마실 때마다 내 가족이 떠올랐다. 향긋한 차를 나누며 이야기가 오고 가는 호사로운 순간을 내 부모 형제와 나눈 일이 없기 때문이다. ‘다담 茶啖’ 또는 ‘차담 茶啖’이라 불리는 다과상은 우리의 식문화 속에 예로부터 존재해 왔다. 차를 마시는 행위는 망중한을 즐길 줄 아는 일상 속 풍류였던 것이다. 슬프고 무기력한 근대화와 격동의 현대사를 겪으며 단지 ‘먹고살기에 바빠서’ 삶의 여유를 망각한 채 살아온 것뿐이다. 그 일상의 전통을 사소하게나마 돌이키기 위해, 최근 다기를 수집하는 취미가 생겼다. 손수 빚은 도자기 위로 정성스레 다과를 올려 그 누구도 아닌 나의 가족에게, 내 식구를 위한 차담을 올릴 것이다.




찻잔과 차받침이 세트로 구성된 다기는 넉넉한 크기와 다양한 색의 배합으로 취향껏 고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호박색을 띤 찻잔을 마주했을 땐, 집안의 대들보로써 묵묵히 한자리를 지켜온 아버지가 떠올랐다. 우윳빛이 도는 미색은 언제 어디서나 애타는 마음으로 가족의 안위만을 바라고 또 바라는 어머니의 희생이, 연회색은 내 앞에 서서 늘 길잡이가 되어 준 두 살 터울의 손위 언니를 닮아 있었다. 수줍은 노랑을 머금은 찻잔에서는 가족 앞에서 속절없이 철부지 티를 내는 나의 모습을 보았다.




큼지막한 팔각 그릇을 꺼낸다. 어떤 그림을 그려도 아름다운 색채로 묻어날 듯한 미색의 캔버스다. 직선의 조형미가 돋보이는 쉐입은 그 자체만으로 완성된 하나의 액자 같았다. 팔각 그릇 위로 케이크와 비스킷을 담는다. 백설기 시트에 바닐라 생크림을 가득 채운 롤케이크는 구름같이 부드럽다.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현대식 식도락의 결정체다. 생크림 속에 파묻힌 거뭇한 바닐라 빈 조각이 침샘을 자극한다. 녹차 초콜릿과 진한 풍미의 초콜릿 쿠키가 어우러진 비스킷도 나란히 올린다. 제주의 푸른 차밭이 연상되는 완벽한 채도의 둥근 초록빛이 찻상을 화사하게 물들인다. 먹는 즐거움뿐 아니라 보는 즐거움 또한 차담의 생기를 더한다. 구수한 향미가 풍기는 덖음차는 차호에 옮겨 담아 잘 보이는 곳이 놓는다. 차를 곁에 가까이 두고 언제든 차의 시간을 갖기 위함이다. 부드러운 롤케이크 사이로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난 올리브 포크를 꽂는다. 고흐의 과감한 붓 터치가 떠오르는 나뭇결의 생생한 패턴과 향긋한 올리브 나무 냄새가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차가 흐르는 시간 속엔 일상이 저만치 물러가 있고, 이상이 이만큼 다가와 있는 듯하다. 



달콤한 백설기 롤 케이크와 녹차 비스킷을 한 입 씩 베어 물고, 쌉싸래한 덖음차 한 모금으로 입안의 잔여물을 쓸어내린다. 입술에 닿는 찻잔의 매끄러운 감촉을 따라 달콤 쌉싸래한 교향곡이 입 속에서 춤을 춘다. 때로는 달콤하며, 때로는 쌉싸래했던 내 가족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소박한 일상 속 넘치는 행복은 신기루가 아니다.



멋쩍은 미소와 함께 일상의 작은 사치를 내 가족에게 베풀어 본다면, 그 또한 먼 훗날 21 세기식 다담으로 기억될 사소한 전통이 될 것이다.



https://post.29cm.co.kr/11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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