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한옥 일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stain Life Jul 31. 2021

장마의 추억

장보현의 <일상, 이상> X 29cm WEEKLY ESSAY



잠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여름의 풍경을 돌이켜 보자. 사랑방 툇마루 너머 짚과 흙으로 쌓아 올린 헛간엔 갖은 작물이 뙤약볕을 맞으며 벽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 마당으로는 들과 논에서 거둬들인 햇것들이 쌓여가는 중이다. 오후의 어느 때가 되면 할아버지는 헛간으로 발길을 옮겨 손작두를 꺼내 들고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풀때기를 썰기 시작했다. 칼날 사이 서걱서걱한 소음이 둔탁하게 울려 퍼졌다. 달콤한 풋내에 살며시 허기가 밀려왔지만, 그것은 엄연히 나를 위한 요리가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버릴 것 하나 없는 옥수수 잔해를 소여물로 주기 위해 조각내고 있던 것이다. 마당 오른편 외양간에 자리한 소들은 눅진한 타액을 입가에 머금고 할아버지가 건네는 여물을 퍽 맛깔스레 받아먹었다. 그렇게 소는 ‘약에 쓸 때도 있는 소똥’을 배출하였을 테고, 분변이 쌓이면 다시금 유용한 밑거름으로 들과 논에 흩뿌려져 돌고 돌았을 것이다.


이내 비가 내린다. 하늘은 온통 잿빛이다.



이내 비가 내린다. 하늘은 온통 잿빛이다. 지상과 곧 닿아버릴 듯한 짙은 수증기 덩어리가 대지를 참호 삼아 바짝 엎드려 있다. 상반된 성질의 거대한 공기층이 세력 다툼을 벌이는 중이다. 교전이 치열해지려는 순간, 온난전선과 한랭전선의 경계면으로 굵은 빗방울이 무자비하게 떨어진다. 평평하게 돋아 놓은 마당은 마치 달의 분화구같이, 설산의 크레바스처럼 삽시간 움푹 패어 흙탕물을 찰방인다. 처마 밑으로 후두두 떨어지는 빗물 소리에 노곤한 낮잠의 유혹이 달아난다.


대청엔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모여 앉았다. 장마가 도래할 무렵, 농번기의 고된 노동을 일단락 지은 큰집 어른들은 집에 머무르며 망중한을 즐겼다. 큰아버지는 점심과 저녁 사이 들판에서 중참을 먹던 습관으로 요깃거리를 찾곤 했는데, 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영락없이 콩기름에 부친 전 따위가 상 위에 올랐다. 지천으로 널린 감자와 호박, 지난해 담근 묵은 김치 등 특별할 것 없는 재료를 밀가루 반죽에 부친 것이었다. 



장마 전선에 포위된 모든 것이 습한 기운을 머금고 축 늘어졌지만, 지붕 아래 펼쳐진 대청만큼은 둘러앉은 가족의 훈훈한 온기로 화한 분위기를 발했다. 부엌에서 풍기는 고소한 기름 냄새, 간장 종지에서 흘러나오는 비릿한 짠 내, 술 주전자에서 새어 나오는 알싸한 누룩 향 등 세태의 향기가 여름의 공기를 타고 돌았다. 나는 장맛비가 지상에 부닥치는 산발적인 마찰음에 귀를 기울이며 할아버지 무릎에 올라앉아 망중한에 펼쳐진 주안상에 고사리 같은 손을 살며시 포갰다. 할아버지는 색 바랜 놋수저에 동그랗게 퍼 올린 막걸리 한 숟갈을 보약이라도 되는 양 내 입에 물렸다. 나는 미간을 찌푸려가며 안면 근육을 힘껏 구겼다. 그 모습을 지켜본 어른들은 어린아이의 안위 따위 아무도 관심 없다는 듯 마냥 행복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혓바닥과 입천장을 톡톡 두드리며 목뒤로 넘어가는 막걸리의 청량감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보다 나로 인해 뭇사람들이 행복에 겨운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안상 곁에서 받아먹는 막걸리 한 모금은 술이 아닌 묘약으로 다가왔다. 


연일 내리쬐는 뙤약볕과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는 소낙비 사이에서 여름의 기억이 하나둘씩 되살아난다. 한 아름 꺾은 옥수수 껍질을 한 꺼풀씩 벗기며, 병마다 자글자글 피어오르는 누룩의 생생한 움직임에 귀를 기울이며, 고소한 기름내 풍기는 둥그스름한 전을 바라보며.




하늘이 서서히 물들어 가더니, 
세찬 빛방울이 지붕을 두드린다.


서걱서걱 썰려 나간 옥수수 밑동 사이로 뽀얀 진액이 송골송골 맺힌다. 풋풋한 단내가 습한 대기를 타고 돈다. 식탁 한 편에 어느새 소복이 쌓인 껍질은 들판 위 파릇하게 펼쳐진 옥수수밭을 연상케 한다. 그렇게 속 잎을 벗겨내면, 비너스의 풍만한 머리칼처럼 싱그러운 옥수수수염이 드러난다. 마침내 껍질과 수염을 벗은 샛노란 옥수수가 가지런한 인사를 건넨다. 한 알 한 알 옹골차게 양분을 머금은 건강한 미소에 생의 기쁨이 밀려온다. 손질한 옥수수를 뜨겁게 달군 찜솥으로 옮긴다. 수증기 돔에 갇힌 옥수수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오른다. 갓 쪄낸 옥수수를 대나무 채반에 차곡차곡 담는다. 옥수수 한 바구니는 그 자체만으로 여름의 정물화가 된다. 




김 서린 옥수수 한 자루를 움켜쥐고 서둘러 식히기 위해 툭툭 분지른다. 조각난 옥수수를 화형 백자에 포갠다. 순백의 꽃 사이로 노란 수술이 피어난다. 한입에 베어 문 옥수수 알갱이 대여섯 조각을 입속에 털어 넣는다. 상큼한 단내가 톡톡 터진다. 열기에 후끈 달아오른 몸을 식히려 매실청 냉차 한 잔을 들이켠다. 가늠할 수 없는 원초적인 기쁨이 밀려온다. 오롯한 여름의 맛이다.



하늘이 서서히 잿빛으로 물들어 가더니, 세찬 빗방울이 지붕을 두드린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호우에 빗물이 들치기 시작한다. 지붕 배수로와 하수구가 막혀 범람하기 직전이다. 황급히 옥상에 올라 나뭇가지와 낙엽이 뒤엉킨 찌꺼기를 치운다. 굵은 빗방울이 맨살을 때린다. 물세례에 흠뻑 젖은 살결은 한결 서늘한 온기로 감돈다. 한풀 꺾인 더위에 한숨 놓는가 싶더니 장맛비와 벌인 게릴라성 교전으로 피로가 엄습한다. 




시절의 가운데 놓인 기억은 천연덕스레 주안상을 찾는다.



시절의 가운데 놓인 기억은 천연덕스레 주안상을 찾는다. 도자기와 놋수저, 전과 막걸리가 놓인 소반에 둘러앉는다. 원형의 접시는 달의 형상을 닮았다. 완벽한 구형이 아니라, 어딘가 이지러지고 모난 상처투성이의 달을. 선조들은 우주의 풍파 속에서 수십억 년을 버티며 불완전한 항상성을 유지해 온 달의 모습을 도자기에 투영했다. 



나는 일상성이 깃든 사물에서 수수한 자연미를 발견할 때마다 알 수 없는 희열에 사로잡히곤 한다. 한 손에 포근하게 감싸 안은 아담한 그릇은 막사발의 미학을 품고 있다. 위는 넓고 아래는 좁으며, 굽이 있는 소박한 정형미가 꾸밈없는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사발에 막걸리 한 잔을 따라 붓는다. 살아 숨 쉬는 누룩의 생동감이 고요한 호숫가 위로 유연한 파동을 그리는 소금쟁이의 움직임과 닮았다. 탁한 빛이 가라앉기 전에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켠다. 자연스레 발효된 청량한 달콤함에 무더위와 장마에 얼룩진 여름의 피로가 씻겨 내려간다. 놋으로 빚은 젓가락 한 벌을 움켜쥔다. 빛나는 듯하나 반짝이지 않는 은은한 광택의 유기를 마주할 때마다 쩌렁쩌렁한 쇳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김수영 시인의 말마따나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둥근 접시에 가지런히 놓인 전을 하나씩 집어 올린다. 감칠맛으로 가득한 김치전, 향긋한 쪽파와 풍부한 해산물이 뒤섞인 해물파전, 입안에서 녹아내리는 고소한 육전과 부드러운 계란 반죽 속으로 탱글탱글한 탄성을 유지하는 새우전의 다양한 조합이 먹는 재미를 더한다. 바삭한 기름기가 막걸리 한 사발을 재촉한다. 




밥이 술이 되고, 술이 밥이 되는 사발 한 그릇의 미학에 저녁 식사는 잊은 지 오래다. 




여름의 그림자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은 미풍 속으로 이따금 찬 바람이 섞여 올 즈음이면, 나는 늘 그래왔듯 흘러간 여름을 무척이나 그리워할 것만 같다. 





https://post.29cm.co.kr/12321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훔친 여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