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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현 Oct 15. 2024

꽃달임

오후가 되자, 큰어머니는 소녀의 권태가 가여워 보였던지 주전자를 하나 건네며 뒷산으로 올라가 진달래 꽃잎을 따오라 했다. 이른 봄에 피는 여린 참꽃은 먹어도 된다며. 소녀는 꽃잎을 먹는다는 것이 신기도 하여 양철 주전자를 왼팔에 끼고 아기 곰이 그려진 신을 다시 한번 성큼 신은 채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지막한 옆산으로 향했다. 


진달래는 희미한 분홍을 띠고 듬성듬성 꽃을 틔우려 했다. 소녀는 꽃잎을 마구잡이로 뜯어 주전자에 구겨 넣었다. 이제 막 피어나 봄을 찬란하게 수놓을, 수많은 연인들의 시상이 되어줄, 벽촌의 무료함을 잠시 달래줄 진달래는 소녀를 원망하며 피를 흘렸다. 그 선혈은 소녀의 손이 닿지 못할 외딴 진달래나무로 번져 더 짙은 선홍빛으로 피어났다. 주전자는 소녀의 욕심을 담아내지 못하고 소녀가 걸어가는 길을 따라 꽃잎을 사뿐히 낙하시켰다. 진달래 꽃잎은 소녀의 발자국이 되었다. 소녀는 콩기름과 곱게 뭉친 찹쌀 반죽, 달콤한 조청을 준비하고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큰어머니를 상상하며 군침을 꿀꺽 삼켰다. 


소녀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무도 소녀에게 관심이 없었다. 큰어머니는 주전자를 쥐여주었으므로 소녀에 대한 의무를 다한 듯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큰아버지와 함께 들로 나갈 채비에 여념이 없었다.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전 같은 건 손이 희고 말도 예쁘게 하는 자신의 어미에게나 어울릴 것이라며 투박한 촌부를 원망하였다. 매사에 참견만 늘어놓았던 할머니에게는 애초에 기대조차 품지 않았다. 


소녀는 주전자를 들고 들로 나가 들병이처럼 쏘다녔다. 매력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어린 들병이, 술 대신 구겨진 진달래꽃이 한가득 담긴 주전자를 든 어이없는 들병이. 소녀는 주전자에 손을 넣고 진달래꽃이 잡히는대로 입에다 마구 쑤셔 넣었다. 진달래꽃은 검붉은 진액을 짜내며 소녀의 코 끝에 알싸한 기운을 전달했다. 꽃잎이 아랫니와 윗니 사이로 녹아들어 갈 때 소녀는 저만치 달리는 열차를 발견했다. 기차는 들과 들 사이를 건너 산을 넘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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