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큰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소녀는 할머니 꽁무니를 쫓아 큰집으로 왔던 길을 떠올렸다. 이불속에서 자신의 손과 발을 꼭꼭 주무르고 있는 할머니를 저버리며 소녀는 제 나름 치밀한 계획을 세워 나갔다. 노잣돈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소녀는 돈이 무엇인지 몰랐다. 무엇인지 몰랐을 뿐 아니라 어떻게 쓰는 줄도 몰랐다. 하지만 이곳을 떠나기 위해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어디서 배운 적도 없는 도적질을 감행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동이 트면 할아버지 머리맡 라디오에서는 잡음 섞인 표준방송이 새벽녘 푸른 공기를 타고 흐른다. 아침상이 걷히면 큰어머니와 큰아버지는 경운기를 타고 들로 나간다. 할아버지도 해가 중천에 뜨기 전에 자전거를 타고 읍내 다방으로 간다. 할머니는 낮잠을 자거나 이웃으로 말벗을 찾아 출타한다. 소녀가 누구와 함께 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소녀에게 달렸지만, 아무도 소녀에게 들로 나가자, 읍내로 가자, 이웃으로 놀러 가자 이끌지 않는다. 그렇다면 소녀는 오후가 되기 전에 인기척 없이 천방川防으로 가서 송사리를 구경하다 해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할 즈음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와 도적질을 감행하는 것이다.
소녀는 천방으로 나갔다. 둑에서 노인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햇볕을 쬐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자네, 이번에 사돈 맞았잖는가. 거-는 나-가 우예 되는가?”
“인제 칠습둘인가 먹었제”
“하이고오, 노오랑 소 타고 논두렁을 거닐어 다니겠네”
소녀는 노인들이 누구인지 몰랐다. 그러나 집안 어른들로부터 마을 사람들을 마주치면 먼저 인사를 건네야 한다 들었기에 촐싹거리며 대뜸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니가, 누-즙 아로?”
소녀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였다. 소녀가 이런저런 걱정을 하는 사이 옥비녀를 꽂은 할머니가 소녀를 변호해 주었다.
“민덕이네 와 있는 아 아이라, 승이 막내딸”
“천상이네, 천상. 박았데이, 샐쭘-한 얼굴이랑 꼬시매 함 보시게나. 즈그 애비랑 마카 박았잖는가”
소녀는 옥비녀를 꽂은 할머니에게 무한한 애정과 고마움을 느꼈다. 소녀는 풋사과 같은 미소를 그들에게 한껏 내보이며 방정맞게 ‘안녕히 계세요’를 남발하고서 천방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터벅터벅 돌아오는 길, 소녀는 낯선 트럭 한 대를 발견했다. 확성기에선 결코 알아들을 수 없는 저음질 노래 가락이 흘러나왔다. 매캐한 먼지가 폴폴 날리는 시동이 꺼지지 않은 트럭 주변으로 촌부들이 둘러서 있었다. 소녀는 틈바구니에 낀 큰어머니를 보고 트럭으로 뛰어갔다. 큰어머니는 미원과 다시다, 맛소금, 백설탕, 그리고 밀가루를 샀다. 오색 찬연한 불량 식품 따위가 소녀의 눈길을 사로잡았지만 볼 일을 마친 큰어머니는 소녀의 손을 잡아채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할머니는 대청에 걸터앉아 알뜰하게 모은 음식 찌꺼기를 닭 모이로 주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사랑방에 도사리고 앉아 벼루에 먹을 갈고 있었다. 아래 마을에서 염소 새끼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큰아버지만 외출을 단행했다. 소녀의 짐작대로라면 집에 아무도 없어야 한다. 소녀는 그날 처음 큰집의 일상이 비연속적인 것을 깨달았다.
큰어머니는 방금 산 밀가루를 물에 짓이겨 콩가루를 잔뜩 섞어가며 투박한 손으로 반죽 덩이를 굴리고 또 굴렸다. 아기 엉덩이처럼 매끈한 찰기가 돌자 둥그런 반죽이 도마 위로 펼쳐졌다. 홍두깨에 둘둘 휘감긴 반죽이 큰어머니 손이 스칠 때마다 스르륵스르륵 거리며 콩가루 비린내를 풍겼다. 켜켜이 접은 반죽이 경쾌한 리듬을 타며 칼끝을 스치자 국수 가락이 흘러나왔다. 소녀는 어느새 큰어머니 곁으로 다가가 국수를 툴툴 털었다. 달팽이 집처럼 돌돌 말린 국수가 구불구불한 가락으로 펼쳐질 때마다 소녀는 자신의 손길이 큰집 살림에 큰 보탬이 되는 것처럼 뿌듯했다.
국수 한 그릇을 단숨에 비운 어른들은 시나브로 단잠에 빠졌다. 오후의 나른함이 벽촌에 내려앉았지만 소녀는 깨어 있었다. 도적 질 같은 건 까맣게 잊었다. 소녀는 부엌으로 건너가 찬장을 뒤적였다. 큰어머니가 방금 사들고 온 미원과 백설탕 따위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맛소금이 소녀의 미각을 유독 자극했다. 소녀는 맛소금을 톡톡 털어 복조리에 쌓았다.
큰아버지의 라디오에서 ‘아가씨는 어려요’ 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녀는 복조리를 들고 아무도 없는 건넌방으로 사뿐사뿐 걸어갔다. 소녀가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아귀가 어긋난 골마루가 삐걱빼각 소리를 냈다. 건넌방은 늦은 오후의 빛으로 가득했다. 할머니가 가마를 타고 시집 올 적에 할머니의 어머니가 장만해 주었다는 이층 농이 말없이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층 장 위에 놓인 빳빳하게 풀을 먹인 광목은 숨이 푹 죽은 목화솜을 감싸고서 유구悠久한 먼지를 모조리 머금고 있는 듯했다. 창호를 타고 여과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한지를 투과하지 못한 빛은 바닥에 그림자 눈을 내렸다. 소녀는 햇살 눈을 맞으며 오른 검지에 연신 침을 묻혀 맛소금을 찍어 먹었다. 맛소금 성은 이장희의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허물어졌다. 벌어진 문틈으로 송신탑이 붉은빛을 점멸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