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촌의 하루는 해가 뜨기 전부터 분주하다. 단잠을 포기할지언정 태양이 등 진 사이 스멀스멀 올라온 냉습한 땅의 기운을 가만히 날려 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동틀 녘 저무는 희미한 달빛에 기대 보이지도 않는 풀섭을 거닐다 보면 어느새 온몸이 달아오른다. 나풀거리는 얇은 옷가지는 온통 땀으로 축축하다.
여름의 태양은 농사꾼에게 염치없이 일찌감치 떠오른다. 새벽의 푸른 장막이 서서히 걷히면 얼굴을 막 드러낸 말간 태양이 초록 잎사귀에 수줍은 홍조를 드리운다. 농사꾼들은 하루 할당된 노동력의 절반은 이미 다 써버렸을 것이다. 태양은 무심하게 고도를 높이며 대지를 달군다.
소녀는 꿈나라를 헤매고 있을 시간이다. 정짓간에서 달그락 소란이 인다. 들녘에서 돌아온 큰어머니가 대지에 남겨진 농사꾼들을 위해 새참을 마련하는 소리다. 소녀는 짐짓 잠에서 깨어 정지로 나가 큰어머니를 구경한다.
먹을 것이라고는 푸석푸석한 보리밥과 반짝이는 풋고추, 콩 덩어리가 듬성 박힌 시커먼 된장과 묵은 짠지가 전부다. 멸치 비린 내가 증기를 타고 온 집안에 퍼져나간다. 가스불 위엔 펄펄 끓는 솥으로 새하얀 국수 막대가 미끄러져 내린다. 젓가락처럼 딱딱하던 국수는 뜨거운 물속을 헤엄치며 새하얀 거품을 토한다. 무지갯빛으로 일렁이는 거품이 활화산처럼 솟아오르자 별안간 가스불이 꺼진다. 큰어머니는 솥단지를 채반 위로 쏟아붓는다. 상큼한 밀가루 향이 차가운 물세례를 맞으며 증폭된다. 큰어머니는 성한 곳 하나 없는 온통 구겨진 양은 쟁반에 사발을 하나씩 펼치고 찬물에 막 헹구어 낸 반투명한 국수를 둘둘 말아 넣는다. 이윽고 콩기름에 부친 전 배추전 따위가 상 위에 오른다.
소녀는 큰어머니에게 다가서 밭으로 쟁반을 나르겠다며 보채기 시작했다. 집에 잠자코 있는 것이 하도 심심해 따라나서려는 심산이었다. 큰어머니는 소녀에게 코웃음을 쳤다. 그럼에도 머리에 대여섯 개의 사발이 담긴 쟁반을 이고 한 손에 육수 통을 들고 나르는 일에는 이골이 났을 터였다. 허여멀건 아이의 호기가 가소로울지언정 일손을 덜어주려는 손길을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큰어머니는 소녀에게 멸치 육수가 담긴 냄비 손잡이에 물기가 자작하게 스민 행주를 휘감아 주었다. 소녀는 어깨에 힘을 잔뜩 싣고 통을 들어 올렸다. 부여잡은 두 손이 허리 위로 바동거렸다. 겨우 뒤뚱일 정도였다. 육수 통이 무릎에 닿을 때마다 금속판의 미지근한 열기가 소녀의 어린 살갗에 닿았다.
소녀는 쟁반을 머리에 인 큰어머니와 집을 나섰다. 들녘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난 길이 좋았다. 소녀는 굽이진 길을 사박사박 걸었다. 복사꽃은 하마 져버리고 신록이 온 천지에 돋아나고 있었다. 저수지도 곳곳에 움푹 패고 오랜 세월 빗물을 받아낸 잔잔한 물결은 잔가지가 폴폴 떨어져도 대꾸도 않는다. 누군가 씨앗을 받아 듬성듬성 숨구어 놓은 갓은 남녘 들판 시샘 나지 않게 노오란 물결을 한바탕 틔웠다. 몽실몽실 물오른 목단 꽃망울 위엔 고운 송화 가루가 찰싹 주저앉아 새 찬 빗물에 말갛게 씻겨내려갈 날만을 기다리고 구릉지에 만개한 불두화는 자꾸만 부풀어 고개를 떨구려 한다.
큰어머니는 가던 길을 멈추더니 쟁반을 내려놓고서 둑 아래로 내려갔다. 논이 마를 새라 물을 대어 주고는 논두렁 한 편에 새하얀 이불을 덮고 있는 나락을 살폈다. 소녀는 큰어머니 곁으로 다가가 이불 아래로 고개를 빼곡 들이밀었다. 새파란 모가 파닥파닥 올라오는 것이 어찌나 가쁘던지 새싹을 들여다보는 동안 소녀는 숨이 턱 막혔다.
모든 것이 차오르고 있었다. 산들바람에 나부끼는 달풀은 무방비 상태로 떨어지는 빛을 튕겨내느라 쪽빛보다 푸르고, 새때기는 하루가 다르게 성큼성큼 마디를 올리느라 물기슭이 소란스럽다. 미풍에 부닥쳐 산뜻한 내음을 톡톡 쳐내는 모기풀은 향기롭기만 하고 하얗고 붉은 찔레꽃은 온통 푸르기만 한 시절에 방점을 찍는다. 이른 봄날 이서방네 곳간을 두둑이 채워준 앙상한 두릅 군락은 숲을 일궜고 아래 마을 최가네는 더덕을 심어 놓았단다. 송골송골 영글기 시작한 복분자 밭을 스쳐온 바람결에 단내가 일렁였다. 진달래와 참나무는 제법 꼿꼿한 자태로 산기슭을 움켜쥐고 있었다.
선산을 품은 큰집 밭으로 올해는 도라지 씨앗을 흩뿌려 놓았다고 했다. 이제 막 어린 풀이 총총 올라오고 있었다. 큰어머니는 나무 그늘 아래 참 꾸러미를 내려놓으며 한바탕 소리를 질렀다. 일꾼들이 새참 곁으로 모여들자 벽촌의 망중한이 펼쳐졌다. 식은 배추전에서 구수한 비린내가 풍기고 아렴풋한 짠 기가 종재기를 맴돌았다. 술 주전자로 새어 나오는 알싸한 누룩 향이 여름의 공기를 타고 돌았다. 들판 위로 자글자글 피어오르는 생생한 움직임에 소녀는 귀가 간지러웠다.
소녀는 할아버지 무릎에 올라앉아 새참을 받아먹었다. 할아버지는 색 바랜 놋수저로 동그랗게 퍼 올린 막걸리 한 숟갈을 소녀의 입에 물렸다. 소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얼굴을 힘껏 구겼다. 그 모습을 지켜본 어른들은 어린아이의 안위 따위 아무도 관심 없다는 듯 마냥 함박웃음을 지었다. 기포가 소녀의 혓바닥과 입천장을 톡톡 두드렸다. 입속에서 피고 지는 청량한 느낌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보다 소녀는 자신의 익살스러운 표정에 뭇사람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기꺼이 즐겼다.
물처럼, 밥처럼 막걸리를 들이켜던 최 씨 아저씨와 이서방은 담배 주머니에 고이 접어 둔 지폐를 꾸깃꾸깃 꺼내 소녀에게 건넸다. 큰어머니를 바라보며 눈만 껌뻑이던 소녀는 큰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자 두 손으로 돈을 받았다. 소녀는 들에 따라 나오길 잘했다며 속으로 기뻐했다.
그도 잠시, 바깥양반들은 뙤약볕 그늘 아래 단잠을 청했고 아낙들은 손장단을 치며 소녀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 사이를 오가며 익살꾼이 되는 노릇도 시들해졌다. 농사일에 치인 어른들은 아무도 소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외톨이가 된 소녀는 나름의 생존 전략을 세우기 시작했다. 일이 끝날 때까지 잠자코 있는 게 아니라 홀로 집에 돌아가는 것이다. 위풍당당한 자태로 마당에 들어서면 할머니가 소녀를 환대할 것이다. 벌써 다 큰 아가씨가 되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소녀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이 큰일이 아니라 여겼다. 큰어머니가 물을 댄 논자리의 새하얀 이부자락은 퍽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었다. 윗마을과 아랫마을 경계로 난 도로에 다다르자 소녀는 멈칫했다. 집으로 가기 위해선 찻길을 건너야 하기 때문이었다. 신호등도 없는 차도를 어찌어찌 건넌다 해도 마을 어귀엔 굽이진 길이 갈래갈래 휘청인다. 은행나무를 끼고돌면 아래 마을이, 실개천이 흐르는 다리를 넘으면 인삼밭이 지천이라는 위 마을이 나온다. 소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 도무지 몰라 버스 정류장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하염없이 기다리다 보면 큰어머니가 자신을 데리러 올 것만 같았다.
실개천이 자글자글 흐르는 다리 아래 술에 취한 걸인이 웅크리고 누워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걸인이 소녀에게 다가왔다. 소녀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걸인은 소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소녀는 웅얼거리는 걸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걸인의 어조가 노골적으로 거칠어졌다. 돈을 잃어버렸으니 갖고 있는 돈을 좀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소녀는 바지 주머니를 두 손으로 슬그머니 감쌌다. 조금 전 밭에서 어른들에게 받은 꾸깃꾸깃한 지폐가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버스가 도착했다. 한 남자가 내렸다. 남자는 걸인과 소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소녀가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소녀의 손을 따라 나온 지폐가 땅에 떨어졌다. 걸인은 냉큼 돈을 주워 멀찍이 달아났다.
남자는 울먹이는 소녀는 달래며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남자의 말에서 흙냄새가 났다. 이슬 서린 풀 냄새가 났다. 할머니의 할아버지의, 큰아버지 큰어머니의 향기가 풍겼다. 소녀는 왠지 마음이 놓였다. 소녀의 아버지와는 같은 날 태어난 동갑내기라 했다. 돌을 갓 넘긴 소녀가 아장아장 뒤뚱거리던 시절이 모개처럼 동그스름했다며 웃음을 끓었다. 남자는 집안 어른들이 농사일에 여념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자는 소녀를 데리고 도라지 밭으로 향했다.
울먹이며 남자를 뒤쫓던 소녀는 다시 한번 두려움에 휩싸였다. 아무리 걸어도 큰어머니가 물을 댄 논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달풀, 새떼기, 모기풀, 복분자, 두릅도 없다. 성난 아기 울음 같은 짐승 떼의 합창이 고약한 분뇨 냄새를 타고 흐를 뿐이었다. 소녀는 입을 꾹 다물고 숨을 골랐다. 걸음 수를 점점 줄이며 앞서가는 남자와 거리를 넓히는 중이었다. 남자의 뒤통수가 저만치 멀어지면 뒤를 돌아 온 힘을 다해 도망가는 것이다.
때마침 소녀의 뒤로 남자아이가 마른 흙먼지를 폴폴 날리며 달려왔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남자의 아들이었다. 소녀가 벽촌에서 처음 만난 또래였다.
“야가 꽃계 와 있는 그 아래요?”
“그래, 승이네 막내”
소녀는 소년과 발을 맞춰 걸었다. 떼 지은 짐승 소리와 지독한 분뇨 냄새가 더욱 가까워지고 있었다. 반짝이는 연둣빛 이파리 사이 해묵은 가시를 두텁게 드리운 탱자 울타리를 지나자 사슴 무리가 나타났다. 사슴 등성이엔 고운 흙길 위로 듬성듬성 휘날리던 새하얀 탱자 꽃잎이 내려앉았다. 덩치 큰 몇 마리는 탱자나무 가시 같은 화관을 쓰고 있었다.
남자는 도라지 밭 인근에서 사슴을 키우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읍내에 다녀오는 길목에 길 잃은 소녀를 만났고, 소녀의 집안일을 훤히 알고 있는 통에 도라지 밭으로 데려가려 했던 것이다.
소년의 아버지가 집을 비운 사이 암컷 사슴 한 마리가 다리를 구부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몸을 풀려했다. 예기치 못한 일을 수습하느라 황망한 기색이 역력한 남자는 아들을 시켜 소녀를 데려다주라 일렀다. 소녀는 사슴뿔처럼 얽히고설킨 탱자 울타리를 따라 소년의 그림자를 밟았다.
서산으로 해가 뉘엿할 무렵 소녀는 도라지 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무도 소녀를 눈치채지 못했다. 한 풀 사그라든 태양을 등지고 서둘러 일을 매듭지어야 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