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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현 Oct 15. 2024

아람

달빛이 좋은 밤, 새로 태어난 달만큼 이지러진 달을 바라보며 소녀는 기대에 부풀었다. 소녀의 아버지가 머지않아 자신을 데리러 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큰어머니는 들에서 정성껏 추린 햅쌀을 포대에 옮겨 담고 있었다. 


다음 날, 큰어머니는 작은 아버지를 앞세워 차를 타고 읍내로 나갔다. 소녀도 함께 길을 나섰다. 추석을 앞두고 문전성시를 이룬 방앗간은 마을 사람들로 북적였다. 쌀 빻는 기계에선 물에 불린 쌀알이 지우개 가루처럼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소녀의 마음은 희망에 가득 차올랐다. 시절의 한가운데 빛나는 보름달처럼, 반짝이는 햅쌀처럼, 새하얗게 부풀어 올랐다. 


집으로 돌아온 큰어머니는 대청에 자리를 잡고 미지근한 물에 갓 빻은 쌀가루를 섞어 반죽을 굴렸다. 보름달처럼 동그랗고 새하얀 반죽이 큰어머니 손바닥 위로 떠올랐다. 소는 설탕에 조린 올콩이 전부였다. 큰어머니 곁으로 약속이나 한 듯 일가친척들이 모여들었다. 소녀는 달달한 콩을 오물거리며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손을 보탰다. 아궁이엔 뒷동산에서 꺾어 온 소나무 가지가 송진을 토하며 타오른다. 매캐한 솔향이 새하얀 연기를 타고 돈다. 솔잎이 너부러진 솥단지에 막 빚은 송편이 오른다. 시커먼 콩물이 얼룩덜룩 비친 것은 사촌 형제가 빚은 것이고 소보다 반죽이 퍽 두터운 것은 할머니의 것이다. 부러진 지우개처럼 볼품없는 건 소녀가 주무른 것이고 손자국 하나 없이 말끔한 것은 큰어머니가 빚은 것이다.  


햅쌀과 해콩으로 빚은 송편은 상쾌한 솔향을 쐬고 금빛 들판이 짜낸 참기름을 입었다. 해가 들지 않는 시렁 아랫목에 잠들어 있던 들녘에서 추린 모양도 맛도 가장 좋은 햇것들이 비로소 빛을 발한다. 토실하게 여문 햇밤은 매끈하기 만하고, 초록의 기운이 완연히 가시지 않은 가을 대추에서는 왠지 향긋한 사과 내음이 풍긴다. 콩가루에 버무린 토란대와 고사리, 짠 장으로 자작하게 볶은 무와 도라지, 두툼한 소고기 산적, 발가벗은 닭과 흐릿한 눈동자가 듬성 박힌 생선 등이 정짓간에 두둑이 자리하면 마침내 전야제가 마무리된다. 


다음날 동이 틀 무렵 두루마기를 걸친 엇비슷하게 생긴 남자들이 삼삼오오 모여든다. 찬란한 가부장제를 위한 축제가 열린다. 제사다. 두어 시간 남짓 의식을 치르고 나면 문중 어른들은 대청에 흩어 앉아 간밤에 버무린 나물 따위를 뜨거운 쌀밥에 올려 찝찔한 탕국 한 그릇과 들이켠다. 같은 성 姓 을 바깥양반으로 둔 부녀자들은 정짓간 구석구석에 옹기종기 걸터앉아 전야제의 회포를 비로소 나눈다. 소녀는 밥보자기로 감싼 제수 음식 한 꾸러미를 들고 논두렁을 총총 뛰어넘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는 사랑채로 향한다. 


늦은 오후, 벽촌의 일상이 제자리를 찾아갈 무렵 소녀의 아버지가 도착했다. 어머니와 언니는 곁에 없었다. 식어 빠진 제삿밥 한 상을 성큼 비운 아버지는 사랑방에 들어가 할아버지 할머니와 얼마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녀는 툇마루에 앉아 뒷굽이 닳은 아버지의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신발이 저만치 떨어져 있는 모양새가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녀는 대뜸 제 신발을 가져다 아버지의 신발 곁에 가지런히 놓았다. 건넌방에 걸려 있는 외투의 소재도 파악하고 있었다. 마을 어른들로부터 간간이 모은 지폐와 동전은 콩주머니에 잘 숨겨 두었으나, 돈 따위는 소녀의 관심 밖이었다. 


아버지가 구부정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내밀며 사랑방 문턱을 넘었다. 소녀의 아버지는 소녀에게 대뜸 돈을 쥐여주었다. 소녀는 의아했다. 이대로 아버지를 따라 집으로 돌아갈 텐데 돈을 준다는 것이 이상했다. 아버지는 홀로 큰집을 떠났다. 소녀는 목구멍이 간지러웠다. 소리 내어 울기엔 큰집 식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간신히 눈물을 붙들어 맨 소녀는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할머니는 괜스레 소녀를 달래려 화투짝을 꺼내 보였다.


할머니는 소녀의 운을 점쳐 주겠다며 화투패를 네 줄씩 무작위로 정렬한 뒤 짝을 맞춰 나갔다. 국화와 단풍이 합을 이뤘다. 국화는 술을 마실 운이고, 단풍은 근심이 생길 징조라 했다. 술과 근심은 소녀가 모르는 말이었다. 절벽 기암괴석에 핀 국화 아래 흐르는 강물이 술인듯싶었고 단풍이 우거진 숲속에서 뒤를 돌아보는 사슴은 왠지 슬퍼 보였다. 소녀는 예쁜 벚꽃이나 목단이 나오지 않은 것을 그저 아쉬워할 따름이었다. 


소녀는 이부자리에 누워 어깨를 들썩이다 이내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땐 들녘을 타고 밤안개가 밀려오고 있었다. 보름달이 막 모습을 드러내려 했다. 소녀는 자리에 가만히 누워 문틈 사이로 밝아오는 여전히 이지러진듯한 달을 응시했다. 달님에게 소원을 말하면 이루어진다 들었다. 소녀는 아무것도 빌지 않았다. 어서 어른이 되어버렸으면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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