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아버지가 세상을 뜨기 얼마 전부터 소년과 소년의 어머니는 창고로 쓰던 방에 잠자리를 마련하고 살았다. 소년의 아버지의 괴성은 하루에 다섯 번 정도 울려 퍼졌는데 먹을 것과 술을 갖다 달라는 외침이었다. 소년의 어머니는 소년의 아버지를 정성껏 돌봤다. 욕창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몸을 뒤척이고 갖은 죽을 끓여 먹이며 이가 다 빠진 그의 연명을 도왔다.
세상을 곧 등질 것만 같았던 소년의 아버지는 아내의 보살핌으로 얼마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퉁퉁 부은 손으로 잇몸만 남은 입가를 수줍은 듯 가리며 엉거주춤 두 발로 서 사슴 우리를 들여다보기도 했다. 술에서 깬듯한 얼굴은 갓 태어난 아이처럼 순수하기만 했다. 소년의 아버지는 방구석에 죄인처럼 쪼그리고 앉아 망가진 얼굴로 애써 웃음 짓고 있었다.
정확히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다시 술을 찾았다. 소년의 어머니는 아버지 방으로 말없이 술을 들였다. 정성 어린 보살핌은 없었다. 소년의 아버지의 방은 그대로 그의 무덤이 되어가고 있었다. 소년이 한 번씩 드나들 때마다 문틈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흘러나왔다. 말라비틀어진 쌀알과 술이 뒤섞여 이상야릇한 단내가 풍겼다. 너무도 희고 너무도 앙상한 한 인생이 소년의 곁눈으로 스쳤다. 차가운 물에 퉁퉁 불린 쌀밥 한 그릇을 머리맡에 놓고 나오는 길이었다. 얼마 뒤 소년의 아버지는 죽음을 맞이했다. 벽지에 스민 때자국과 문틈에 눌어붙은 납작한 밥풀이 소년의 아버지가 남긴 전부였다.
소년의 아버지가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소녀의 큰집 사랑방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할머니는 담배를 태우며 모서리가 닳은 화투장을 만지작거렸다. 할아버지는 도사리고 앉아 옅은 눈이 쌓인 들을 바라보며 먹을 갈았다.
큰아버지는 외투를 걸치고 길을 나섰다. 소녀도 엉겁결에 큰아버지 뒤를 쫓았다. 할머니가 노여운 목소리로 소녀를 꾸짖었다. 소녀는 울먹였다. 사슴 아저씨가 죽은 것이 제 탓 같았다. 느티나무 구멍에서 주운 소주 때문인 것만 같았다. 큰아버지는 소녀를 어르고 달래 할머니 곁으로 돌려보냈다. 할아버지는 바지춤에서 열쇠를 꺼내 굳게 닫힌 벽장문을 열었다. 벽장에 잠들어 있던 날짜 지난 두유와 말라비틀어진 곶감 따위가 소녀의 입속을 달래 주었다.
“인정이 참 많은 아-였는데…”
“하이고, 매란없데이. 부처가 꺼꾸로 섰는겔따”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할아버지는 석유난로에 불을 붙였다. 소녀는 으레 난로 위에 놓인 빈 주전자와 연적을 들고 물을 담으러 사랑방 문턱을 넘었다. 소녀는 장독으로 둘러싸인 수돗가 아래 조왕 주발처럼 고이 자리한 대야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대야에 낀 살얼음이 아슬아슬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소녀는 손가락 끝으로 종잇장처럼 얇은 얼음을 툭 건드렸다. 부서진 얼음조각 사이로 서슬 퍼런 물이 일렁였다. 대야에 연적을 담그자 두 개의 구멍으로 기포가 둥둥 떠올랐다. 소녀는 손끝으로 얼른 구멍 하나를 막았다. 연적이 소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연적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소녀는 냉큼 손끝을 떼었다. 다시금 기포가 솟으며 연적에 물이 차올랐다. 소녀는 거듭 구멍을 막았다. 마침내 연적이 숨을 멎자 소녀의 손끝은 연적 구멍만 한 자국으로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퉁퉁 부은 손이 이제야 시려 왔다.
소녀는 물이 가득 찬 주전자와 연적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물이 끓자 주전자 주둥이로 뽀얀 김이 솟아올랐다. 소녀는 할아버지 곁으로 다가가 연적 한쪽 구멍을 막고 벼루에 물을 따라 부었다. 눅진한 먹물 사이로 한겨울 지하수가 휘몰아치며 쿰쿰한 먹 향이 튀어 올랐다. 할아버지 귓바퀴를 타고 늘 맴도는 냄새였다.
할아버지는 벼루 윗목에 붓을 걸치고 푸른 바탕에 흰빛이 도는 사기 잔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찻잔을 두어 번 빙빙 돌리자 캐러멜처럼 굳어 있던 커피 찌꺼기가 말끔히 사라졌다. 할아버지는 문방 文房으로 가득한 책장 틈에서 커피와 프림, 설탕이 담긴 유리병을 꺼내 동일한 비율로 섞었다. 프림과 설탕이 담긴 잔은 소녀를 위한 것이었다. 소녀는 할아버지가 태워 준 가짜 우유를 마시고 스르르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