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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현 Oct 15. 2024

풋눈

장례 마지막 날, 소녀는 할아버지 허리춤을 붙잡고 자전거에 올랐다. 밤새 옅은 눈발이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싼 나지막한 산과 들은 새하얀 명주를 걸치고 벌거벗은 나무를 추켜 세운다. 할아버지 손끝을 타고 흰 종이 위로 흐르던 자획 字劃처럼 시커먼 나뭇가지가 이리 나부끼고 저리 나부낀다. 


어느새 상중이라 쓰인 등불이 반딧불처럼 희미하게 반짝인다. 소녀의 눈동자는 소년의 발꿈치를 쫓느라 부산스럽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소년은 없다. 소녀는 터벅터벅 집을 나와 새때기가 춤을 추던 강가에 간다. 언 강 위엔 국수 반죽 위로 흩뿌린 뽀얀 밀가루처럼 하얀 것이 내려앉았다. 소녀는 소년과 마주 앉았던 강기슭에 멈춰 선다. 낯익은 조각보가 발끝에 스친다. 소녀가 느티나무에 꽁꽁 숨겨 두었던 콩 주머니다. 실밥은 뜯겨 나가고 자루 속엔 아무것도 없다. 


강 건너 해가 저물고 있다. 시들해 가는 태양의 끝자락은 소녀를 집어삼킨다. 짙은 노을에 흠뻑 젖은 소녀는 붉게 물든다. 어스름이 밀려오려 할 때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끌고 소녀에게 다가온다. 할아버지는 나목 아래 자전거를 세운다. 할아버지는 소녀를 정성스레 끌어안아 자전거 뒷좌석에 앉히고서는 외투 안주머니에서 구겨진 담뱃갑을 꺼낸다. 이내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문다. 할아버지 입에서 새하얀 뭉게구름이 피어난다. 구름은 향긋하기만 하다. 할아버지와 소녀는 낮과 밤의 경계에 걸친 들판을 달린다. 세상은 온통 하얗다.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소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인다. 산등성이로 사슴 한 마리가 튀어 오른다. 사슴 이마에 드리운 새하얀 뿔이 뽀얗게 웅크린 목련 솜털처럼 간지럽다. 소녀는 할아버지 허리춤에 코를 파묻고 새카만 사슴 눈동자를 바라본다. 사슴 아저씨가 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소년의 모습 또한 서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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