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보현 Oct 15. 2024

늘봄

마을 어귀, 거대한 뿌리를 내린 당산목이 하늘을 향해 가지를 치켜세운다. 천지의 심장이 크게 한 번 요동친다. 거대한 뿌리만큼이나 얽히고설킨 잔가지가 신명을 향한다. 나무는 마을에 결계를 치고 삶과 죽음을 관장한다. 


마을은 평화롭다 못해 권태로 가득하다. 나지막한 산지 아래 골짜기를 따라 들녘이 펼쳐지고 우물가엔 물이 흘러넘친다. 오목하게 내려앉은 개여울 빨래터에선 아낙들이 새하얀 옷가지를 질펀하게 두들긴다. 주고받는 시시콜콜한 잡담에는 주제의식도 없고 명분도 없다. 빗장도 없는 봉긋한 집집은 다가오는 밤이 두렵지도 않고 밝아오는 아침이 서두를 것도 없다. 시절의 흐름에 몸을 맡길 뿐이다. 일상이라 해봤자 가족과 이웃을 돌보는 것이 전부다. 동틀 녘 태어난 서리태 같은 염소 새끼는 목청껏 울어대는데 기쁠 것도 없고 간밤에 생을 달리 한 아래 마을 영감 댁 곡소리는 슬프지도 않다. 삶과 죽음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다. 삶은 거짓말처럼 지속되고 죽음은 생각보다 쉽게 잊힌다. 


뒷산엔 진달래가 다시금 피어오르려 한다. 소녀의 눈두덩은 옹크린 진달래 망울같이 수줍게 번져 있다. 목구멍은 진달래 꽃잎을 오물거리다 미처 삼키지 못했는지 물컹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태초의 의성어가 금세 튀어나올 것만 같다. 


할아버지는 도사리고 앉아 할머니가 부산하게 짐 꾸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큰어머니는 김 위에 밥을 말고 있다. 참기름과 맛소금으로 설겅설겅 버무린 쌀밥에 성큼 부친 두툼한 계란과 물에 씻은 묵은 짠지가 전부다. 폴폴 치솟는 김 아래 냄비 속 달걀이 서로 부딪히며 글글글 끓고 있다. 큰아버지는 괜스레 여물을 재촉하는 소에 들러붙어 툴툴거린다. 소녀를 데리고 나설 할머니만이 굽이진 마음에서 한 발치 달아나 있다. 


“후-제, 놀러 온네이” 


산과 들에는 어린잎이 늙은 나이테를 뚫고 봄의 향연을 펼치려 한다. 할머니는 소녀를 데리고 구부진 길로 나선다. 지난봄, 진달래꽃 가득한 주전자를 들고 소녀가 쏘다닌 들길을 걸어갈 것이다. 소리 없이 사라져 가던 열차를 타게 될 것이다. 


소녀는 뒤를 돌아본다. 할아버지가 사랑채 툇마루에 우뚝 서 있다. 


푹 꺼진 아랫목이 등허리를 따스하게 감싸 안을 것이다. 사랑채 띠살문이 늘 밝아올 것이다. 소반에 엉겨 붙은 비릿한 짠 내가 콧잔등에 맴돌 것이다. 대청의 반짝임과 툇마루의 메마름이 발바닥을 간지럽힐 것이다. 기둥마다 대들보마다 서까래마다 듬성 박힌 시커먼 옹이 너머 아로새긴 할아버지의 아버지의 할머니의 어머니의 얼굴들이 그리울 것이다. 푸른 흙냄새 이는 사투리가 관자놀이를 타고 내내 머무를 것이다. 머위 풀 우거진 울 밖을 언제고 헤맬 것이다.


할아버지 눈길은 소녀의 발자국을 쫓고 있다. 들녘엔 구겨진 휴지 조각이 새하얀 도라지 꽃인 듯 여기저기 피고 진다. 소녀는 할머니 뒤를 따라 흐드러진 꽃길을 취한 사람 마냥 휘청이며 거닐었다. 

이전 09화 풋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