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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현 Oct 15. 2024

무서리


첫서리가 내리자 큰어머니와 큰아버지는 도라지를 캐기 위해 분주한 나날을 이어갔다. 소녀는 들판이 그리워 큰어머니와 큰아버지 뒤꽁무니를 쫓았다. 


“서리가 호박잎을 폭 삶아놨네”


지천에 널린 풀데기는 끓는 물에 데친 듯 축 늘어져 있었다. 하얗고 보란 별이 쏟아지던 도라지 밭은 온 데 간 데 사라지고 복숭아와 살구나무도 마른 잎을 떨구려던 참이었다.


일이 끝나 갈 무렵 사슴 아저씨가 밭을 찾았다. 소년도 곁에 있었다. 아저씨는 아들과 함께 너부러진 도라지 줄기와 잎 따위를 트럭에 실었다. 사슴 먹이로 주려는 것이었다. 품앗이로 논에 쌓인 볕단을 옮겨준다 했다. 겨울이 내려앉기 전 도라지 밭을 짚으로 덮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큰어머니 큰아버지와 함께 트럭에 올랐다. 숨 가쁘게 물길을 재촉하던 푸른 물결은 사라지고 바짝 마른 볏짚이 초가지붕처럼 쌓여 있었다. 산등성이는 붉고 푸르며 노랗다. 그때 짚더미를 뚫고 어린 사슴 한 마리가 번쩍 튀어 올랐다. 소녀의 할머니가 짝을 맞춰 준 화투와 꼭 같은 모습이었다. 소녀는 별안간 소리를 질렀다. 


“사슴이다!”


지난여름 탱자 울타리 너머 태어난 사슴이었다. 아저씨와 큰아버지, 큰어머니는 하던 일을 멈추고 사슴을 쫓았다. 소년과 소녀도 힘을 보태기 위해 사방으로 뛰었다. 


소년과 소녀는 어느새 물녘에 닿았다. 호수처럼 잔잔하던 개천은 금방이라도 넘쳐흐를 듯했다. 태풍 끝자락이 흩뿌린 빗물이 강기슭을 삼킨 뒤였다. 은빛 사위을 너울거리던 새때기며 달풀은 강바닥에 스러진 채 강물이 흘러간 방향을 가리켰다. 소년과 소녀는 흐르는 강물을 그저 바라보았다.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묵은 때와 먼지가 모조리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수면 위로 비친 태양의 잔광은 불어난 강물만큼 더욱 찬란하게 빛났다. 


소년은 소녀에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돈을 많이 벌 것이라 했다. 이틀에 한 번꼴로 농장으로 사람들이 찾아와 아버지에게 돈을 재촉한다 했다. 소년의 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마신다 했다. 몸과 마음이 산산이 부서져가는 아버지를 위해 소년과 소년의 어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들인다 했다. 취기가 다하는 날이면 소년의 아버지는 광기 어린 촌극을 펼친다 했다. 


강물이 할퀴고 간 생채기 틈으로 빈 소주병 하나가 떠올랐다. 소년은 기슭으로 성큼 내려가 진흙 묻은 병을 건져 올렸다. 소년은 병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 자루에 담았다. 자루 아래 묵직하게 쌓인 빈 병끼리 깨질 듯 부닥치며 제자리를 찾아갔다. 


여태껏 돈을 몰랐던 소녀는 소년의 말에 귀가 뜨이는 듯했다. 집안 어른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종가 고택 어딘가 보물이 묻혀 있다는 것이다. 


조선 초 북방에서 일어난 난을 제압한 소녀의 태곳적 할아버지는 왕으로부터 초상화 한 점과 패도, 은잔 한 쌍을 하사 받았다 했다. 이후 정쟁에 밀려 변방을 떠돌다 소백산 자락에 터를 잡고 집성촌을 이루게 된 것이라 했다. 일제강점기엔 행정 구역 통폐합 명목으로 마을 이름이 바뀌긴 했으나 오백 년 넘도록 이어온 제사를 거르는 법은 없다 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고택은 인민군 본부로 쓰였다 했다. 당시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던 종손의 손부는 기지를 발휘해 유물 몇 점을 기왓장 위로, 땅속으로, 대들보 사이로 숨겨 놓았다 했다. 보물이 모습을 드러낸 건 세월이 흐른 뒤라 했다. 기왓장 위로 둘둘 휘감아 던진 태곳적 할아버지 얼굴이 그려진 족자는 바로 수습했으나 땅에 묻은 칼은 자루가 닳고 칼날은 녹이 슨 채 우연히 찾았다 했다. 


남은 건 은잔의 행방이었다. 한 쌍의 은잔을 발견하면 소녀는 영웅이 되는 것이다. 보상으로 소년의 근심도 덜 수 있을 것이다. 보물을 찾는 동안 소년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을을 누빌 것이다. 소녀는 장대한 포부를 늘어놓으며 소년의 손을 이끌었다.  


먼저 까맣게 탄 사랑채 기둥 아래를 살폈다. 언젠가 불이 났을 때 옮겨 붙은 자국이라 들었는데 동바리 없이 불에 그을린 그대로 사랑채를 떠받치고 있었다. 일부러 그슬려 연한 표면은 털어내고 단단한 결만 남긴 것처럼 견고해 보였다. 소녀가 찾으려는 은잔보다 시커멓게 바랜 기둥이 오히려 보물인 듯싶었다. 소년과 소녀는 끝이 뾰족한 돌을 주워 기단석 주변 땅을 내리쳤다. 오랜 세월 사람들이 딛고 밟은 맨땅은 한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내리칠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것만 같았다. 


소년과 소녀는 돌을 집어던지고 뒷동산에 올랐다. 자물쇠로 성기게 잠긴 사당 문틈으로 제기와 위패 따위가 비쳤다. 소년과 소녀는 가을볕에 반짝이는 모든 것을 발로 차며 다녔다. 풀섭을 헤칠 때마다 가시 풀이 자꾸만 소녀의 발목을 잡아챘다. 도깨비 풀은 기다렸다는 듯 소녀의 바지춤에 매달렸다. 가시풀은 소녀의 발목에 선홍빛 생채기를 그렸고 도깨비 풀은 소녀를 따라 외딴곳을 떠돌 것이라 했다. 은잔은커녕 사금파리, 삭은 비료 포대, 철사 조각, 빛바랜 도토리 따위가 소년과 소녀의 눈에 띈 전부였다. 


마지막으로 소년과 소녀는 느티나무를 타기로 했다. 오백 년 넘도록 마을에 뿌리내린 당산목이었다. 나무 중턱엔 어린아이가 웅크릴 만한 구멍이 있었다. 빈 요람 같았다. 소녀는 대뜸 나무에 올랐다. 반짝이는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온전한 소주 한 병이었다. 그 길로 소녀는 소년을 따라 사슴 농장으로 향했다. 


소년의 아버지가 눈을 반쯤 감은 듯 뜬 채 마루에 걸터앉아 가을의 향연을 만끽하는 듯했다. 쇠락한 아름다움과 풋풋한 서글픔이 산과 들녘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소년은 말없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소주병을 건넸다. 소년의 아버지는 침 섞인 입으로 환하게 웃으며 알아듣지 못할 말을 내뱉었다. 소녀는 사슴 아저씨가 상글한 얼굴로 웃는 게 좋았다. 소년을 돕고 있는 것만 같아 뿌듯했다. 


소년은 금세 비워진 빈 소주병을 자루에 넣고 손수레에 실었다. 소년은 손수레를 끌고 읍내로 향했다. 소녀도 소년의 뒤를 따랐다. 소년은 점방에 들러 공병 한 자루와 소주 한 병을 맞바꿨다. 남은 돈으로는 달고 예쁜 것을 샀다. 그리고 소녀에게 쥐여 주었다. 지난봄, 트럭 뒤꽁무니에서 보았던 오색 찬연한 싸구려 불량 식품이었다. 소녀의 혓바닥은 사슴이 그려진 화투짝처럼 붉고 노랗고 시커멓게 물들어갔다. 빈 병 한 포대를 소주 한 병과 맞바꾼 소년은 한 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소년은 곧장 집으로 가는듯하더니 느티나무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느티나무 요람에 소주를 숨겼다.  


텅 빈 들녘엔 소녀와 소년의 그림자만이 길게 늘어서 있다. 머리 끝자락 너머 희미하게 부유하는 여름의 잔해가 한 줌 걸쳐 있고 땅거미 내려앉은 발아래 어스름한 겨울이 자꾸만 고개를 꿈틀대려 한다. 바람은 몹시도 불었고, 마음속 깊은 곳에 바람이 와닿는 듯했다. 


다음날, 소녀는 느티나무에 기대어 소년을 기다렸다. 다음날도 그랬다. 소년은 나타나지 않았다. 소주는 그대로였다. 소녀는 그간 모은 돈이 담긴 콩자루를 느티나무 한 편에 감추었다. 용돈이 생길 때마다 소녀는 느티나무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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