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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현 Oct 15. 2024

날비

소녀는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를 따라 매일같이 들로 향했다. 소년은 사나흘에 하루 꼴로 도라지 밭을 찾았다. 소년과 소녀는 계곡을 따라 산기슭 중턱으로 향했다. 시절은 하지에 이르렀다. 소녀의 할아버지가 심은 살구며 복숭아나무가 줄 지워 피고 지는 중이었다. 몽실몽실하게 차오른 도라지 꽃망울이 하얗고 보란 별꽃을 막 쏟아내려는 참이었다. 


소녀는 여름을 바라본다. 살진 대지 아래 뿌리내린 아름드리와 풀잎 켜켜이 총천연색 햇것이 시절을 앞다투어 무르익어간다. 소년이 대뜸 복숭아나무에 오른다. 꼭대기엔 보다 찬란한 여름이 맺혔다. 태양을 함뿍 머금은 복숭아가 검붉게 그을린 채 매달려 있다. 어떤 것은 새 부리에 찍혀 생채기투성이고 어떤 것은 무성한 잎사귀에 가려 풋풋한 초록을 뽐내며 싱그럽기만 하다. 소년은 성한 복숭아를 골라 주머니에 구겨 넣고선 나무에서 내려온다. 미풍에 흩날려온 시원한 소낙비가 소녀의 맨살에 부닥친다. 빗방울에 튕겨 오른 마른 흙내가 소년의 코끝을 스친다. 소녀는 소년이 건넨 복숭아를 한 아름 안고 여름을 쪼갠다. 새빨간 껍질을 타고 달콤한 여름이 흘러내린다. 소녀의 혀끝으로 물컹물컹한 실타래가 한가득 퍼진다. 그윽하게 부푼 시절이 소녀의 입속에 흐른다. 


지상과 곧 닿아버릴 듯한 짙은 수증기 덩어리가 대지를 참호 삼아 바짝 엎드린 채 다가오려 한다. 상반된 성질의 거대한 공기층이 세력 다툼을 벌이는 중이다. 교전이 치열해지려는 순간, 온난전선과 한랭전선의 경계면으로 굵은 빗방울이 하염없이 떨어진다. 애써 돋은 밭은 달의 분화구처럼 삽시간 움푹 패어 흙탕물을 찰방인다. 


약속이나 한 듯 모두들 오두막에 모여들었다. 비가 쉬이 그칠 것 같지 않자 일꾼들은 옷가지를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소년은 소녀와 기약 없는 짧은 인사를 나누었다. 굵은 빗방울 너머 소년의 뒷모습이 흐릿해져 갔다. 


대지를 두드리던 세찬 빗방울은 호우로 번져 파도처럼 밀려든다. 계곡이 넘친다. 소녀의 작은 신발이 흠뻑 젖게 생겼다. 소녀는 맨발로 뛰어나가 오두막 안으로 신발을 들인다. 할아버지의 고무신, 큰아버지의 장화, 큰어머니의 슬리퍼, 아기 곰이 그려진 소녀의 작은 신까지. 묵직한 빗방울이 소녀의 맨살을 때린다. 빗물 세례에 흠뻑 젖은 살결엔 한결 서늘한 온기가 돈다. 소녀의 눈이 스르르 감긴다. 


내리쬐는 뙤약볕과 쏟아지는 소낙비 사이를 배회하던 여름은 마침내 장마 전선에 포위되고 말았다. 장마가 도래한 벽촌은 풍요로운 권태로 가득하다. 놀이터를 잃어버린 소녀는 들녘에서 한 아름 꺾은 옥수수 껍질을 한 꺼풀씩 벗기며 시간을 보냈다. 서걱서걱 뜯겨나간 생채기 사이로 뽀얀 진액이 송골송골 맺혔다. 옥수수 껍질로 소복한 툇마루는 들판 위 파릇하게 펼쳐진 옥수수밭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옥수수 잔해를 헛간으로 옮겨 손작두를 꺼내 들고 풀때기를 썰었다. 칼날 사이로 서걱서걱한 마찰음이 둔탁하게 울려 퍼졌다. 달콤한 풋내에 살며시 허기가 밀려왔지만, 그것은 엄연히 소녀를 위한 요리가 아니었다. 소여물이었다. 외양간의 굶주린 소는 눅진한 타액을 입가에 머금고 할아버지가 정성스레 요리한 여물을 퍽 맛깔스레 받아먹었다. 


여름의 그림자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은 미풍 사이로 이따금 찬 바람이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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