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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현 Oct 15. 2024

꽃샘

새벽안개가 짙다. 소녀는 안개와 함께 사라져 가는 별을 바라보고 있다. 주파수가 잡히지 않아 잡음이 뒤섞인 라디오는 밝아오는 새마을의 노래를 부른다. 밤새도록 사랑방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가 소녀의 잠을 방해해도 소녀에게는 그것을 끌 권리가 없다. 


이윽고 둔탁한 마찰음이 소녀의 귀를 울린다. 소녀는 으레 큰어머니가 하루를 시작하는 몸짓임을 짐작한다. 안방과 대청 사이로 난 미닫이가 드르르 열리자 소녀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본다. 소녀의 큰아버지다. 소녀는 큰아버지이든 큰어머니이든 개의치 않고 안개 사이로 희미하게 번져가는 나트륨 등을 주시한다. 큰아버지는 어린것이 새벽부터 혼자 마루에 나와 있는 것을 보고 찡했는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려 소녀에게 재미있는 표정을 보여주려 애쓴다. 소녀의 얼굴은 근심으로 가득 차 있다. 무엇을 하며 오늘 하루를 보낼 것인가 하는 걱정이다. 소녀는 큰아버지를 향해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우스꽝스러운 큰아버지의 얼굴보다 낡은 군청색 바지 밑단을 양말 속으로 아무렇게나 구겨 넣어 볼품없이 부풀려진 발목의 모양새가 애틋하다. 


큰아버지는 사랑방 아궁이에 불을 지피기 시작한다. 소녀의 시선은 나트륨 등에서 장작이 타들어가는 불길로 옮아간다. 봄꽃을 시샘하는 동장군의 입김이 소녀의 마음을 파고든다. 소녀는 나트륨 등과 타들어가는 장작불을 번갈아 바라본다. 귤빛으로 번지는 잔상이 눈가에 어른거리며 장작의 온기가 소녀의 발끝에 닿는다. 소녀는 한동안 아궁이 속을 들여다본다. 불이 활활 타오르며 가마솥에 고인 물이 수증기를 뿜는다. 수증기와 안개는 대기를 진지로 영역 다툼을 벌이려 한다. 수증기는 안개에 휩싸인 희미한 풍경을 선명하게 지워나가고 안개는 수증기가 파고든 공백으로 끊임없이 진군하려 한다. 소녀는 하루가 어서 저물었으면 하는 마음에 큰아버지가 더 큰 장작을 아궁이 속에 밀어 넣기를 바란다. 마침내 백기를 든 안개의 패잔병들은 입자가 고운 알갱이가 되어 큰아버지의 머리칼에 정제된 백설탕처럼 내려앉는다. 


사랑채 띠살문이 경망스레 열린다. 할머니다. 어느새 머리를 곱게 빗은 할머니는 은비녀를 꽂고 문턱에 반쯤 걸터앉아 소녀를 꾸짖는다. 


“야야, 한대 나앉았지 마라. 썩 올라와 이 잩에 와 앉아라.” 


소녀의 할머니는 필터만 남다시피 한 꽁초를 입에 물고 있다. 피다 만 담배 끝은 야무지게 봉합되어 있다. 할머니는 모래 알갱이처럼 반짝이는 성냥갑 측면으로 나뭇개비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붉은 대가리를 톡톡 내려찍는다. 이내 불이 붙은 성냥개비를 입에 물고 있는 꽁초에 갖다 댄다. 훈훈한 담배 연기가 음습한 안개와 뒤섞여 푸른 향이 피어오른다. 어느새 나트륨 등은 꺼져 있고 안개와 함께 사라져 가던 별들 또한 아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안개도 어지간히 걷혀 들녘과 나지막한 산세가 제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려 했다. 소녀는 빛을 잃어가는 별을 아쉬워하며 아기 곰이 그려진 그려진 제 신을 성큼 신고 시야가 트인 들판으로 나아갔다. 


“즈 지지바가 아적부터 와 저래 바잘시럽게 구노”


어린 손녀가 품에서 미끄러져 나갈 새라 늙은 할미는 노기 어린 고함을 내지른다. 수탉이 날카로운 모가지를 울리고 잠에서 깬 소가 우렁찬 공명을 토하면 비로소 하루가 시작된다. 


소녀는 마당에 앉아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며 땅을 쪼는 닭을 바라보았다. 소녀는 짐짓 회상에 잠겼다. 제 언니와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땅을 파고 놀다 수탉에게 호되게 쪼였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소녀는 재빨리 툇마루로 올라가 봉변을 모면했지만 소녀의 언니는 닭에 쫓기다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어쩔 줄 모르는 아이들을 구경 삼아 너털웃음 짓던 어른들은 그저 구경만 할 뿐이었다. 그 뒤로 수탉은 소녀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하는 훈육 선생이 되었다.  


‘우리 언니야는 이거 보고 디게 씩겁했었는데…… 우리 언니야는……’ 


소녀는 속으로 자신의 언니를 되뇌고 또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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