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해한 행성

겐트의 수퍼마켓

by 장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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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트에서 장을 보기 위해 가장 먼저 들른 곳은 <BIO PLANET>이라는 마트였다. 마트의 역사는 1928년, 브뤼셀에서 남쪽으로 떨어진 할레 Halle 지방의 작은 마을 Leembeek로 거슬러 올라간다. 식료품점을 운영하던 Baker Franz Colruyt는 유럽을 뒤흔든 세계 대전 속에서도 사업을 다지며 미국식 체인 슈퍼마켓 모델을 접목시키는 등 사업을 확장한다. 그렇게 성장해 가던 Colruyt 그룹은 1984년 파산 위기를 겪은 뒤 생태와 경제가 공존하는 쪽으로 선회한다. 1999년 할레 최초의 풍력 터빈 건설을 주도하며 지속가능성을 이정표로 삼은 것이다. 이후 기업의 성장이 무한정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경제성의 추구가 생태와 사회가 맞물린 지속가능성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탄생한 브랜드가 바로 <Bio Planet>이다.



장을 볼 때 마다 가장 먼저 발길이 닿는 곳, 제철 식재료가 진열된 코너다. 6월에 접어든 당시, 파프리카는 끝물이며 딸기가 한창임을 알려주는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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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 het ritme van de seizoenen
계절의 리듬에 맞춰

5월엔 "계절의 리듬에 맞춰" 다음과 같은 야채와 과일을 실컷 즐기세요.

파프리카, 콜라비, 청경채, 루바브, 근대, 화이트 아스파라거스가 지천에 널렸답니다.




유제품과 가공품이 진열된 선반으로 눈을 돌린다. 종류도, 형태도 너무도 다양해 무언가 섣불리 점찍을 수가 없다. 눈여겨볼 점은 모든 제품에 'Bio' 마크가 붙어있다는 것.





명성 자자한 벨기에 와플과 돌돌 말린 어여쁜 파스타, 갖가지 차와 곡물류, 귀뚜라미 시리얼 같은 대체식품까지. 유기농 제품이라면 웃돈을 주고 사야 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진열된 모든 것이 궁금했지만 호기심을 남기고 발길을 돌린다. 슈퍼마켓에 들어가면 나의 시간은 쪼그라드는 경향이 있다.



빵이 가득 쌓인 선반 사이 요리책이 매달려 있다. 채소와 과일을 주로 다룬 비건식이 유럽의 식탁을 물들이고 있다. 우측 하단에 진열된 <SOUL KITCHEN>을 발간한 'LANNOO'는 벨기에 최대 실용서 전문 출판사로 바로 우리의 프로젝트를 이끄는 주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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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는 이름만 다를 뿐, 우리에게도 익숙한 씨앗들, 흙조차 오염되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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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채식을 지향하고 탄소 저감 정책을 펼치면서도 육가공품 소비는 떨쳐낼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벨기에 사람들에게 소시지와 치즈는 우리에게 밥과 김치, 된장 같은 존재다. 저녁거리를 찾아 반찬 가게를 헤매듯 식사 시간이 다가오면 정육점과 치즈 진열대는 사람들로 붐빈다. 우리 역시 정육점에 들러 저녁거리를 챙겼다. 뜨거운 기름 위에 올리면 툭 터져버릴 듯한 생 소시지로.




"신선한 유기농 과일과 야채, 고기와 채소, 치즈와 와인, 빵과 스프레드 등 맛있는 식료품은 물론 생태학적으로 관리된 청소 용품 모두를 구입할 수 있습니다. 지속 가능하고 건강하며 맛있고 순수한 음식을 좋아한다면, 제대로 찾아오셨습니다 <Bio-Planet>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Bio-Planet>의 소개 문구다.



기념으로 빗자루와 쓰레받기가 하나로 묶인 청소 용품을 샀다. 이유는 거창하지 않다. 디자인이 예뻐서. 서울로 돌아와 고양이 모래통 옆에 두고서 여전히 잘 사용하고 있다.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닳거나 부러진 곳이 없으니 내구성은 좋은 듯하다.



계산대가 가까워오면 초조와 긴장이 몰려오던 생체 리듬이 이곳에선 작용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서두르는 기색 없이 서로 멀찍이 거리를 두고 줄을 섰다. 커먼즈며 지속가능성이며 알면 알수록 알쏭달쏭하지만 <Bio-Planet>이라는 슈퍼마켓이 구축한 작은 세계가 무해한 행성이고자 했던 건 알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