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수 Sep 21. 2020

R.아케렛(2020), 심리치료 그 30년 후의 이야기

상담실 문을 나선 그 내담자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솔직히 상담자라면 펼쳐보지 않을 수 없는 마성의 제목 아닌가요.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책을 충동구매하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늘 방 한 켠 '안 읽은 책 바구니'에는 책이 한가득이다. 최근에도 스트레스를 받아 폭주해 바구니가 넘쳐흐르는 까닭에 이 책이 서점 사이트에 업로드된 이후로 늘 눈여겨봤지만 구매는 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하해와 같은 기관의 책 구매 시즌이 돌아와 얼른 희망 도서 리스트에 주워 담았다. 


  상담자에게 있어서 상담의 효과성, 상담을 통해 내담자의 삶이 좋은 방향으로 나아졌는가는 중요한 과업이자 매우 고민스러운 지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상담자에게 상담 이후 내담자의 삶에 대한 다룰 것이 분명해 보이는 이 책은 필연적으로 열어볼 수밖에 없는 판도라의 상자가 아닐까. 


 저자인 로버트 U. 아케렛은 1928년 스위스 태생으로 콜럼비아 심리학 박사를 취득 후 에리히 프롬과 롤로 메이에게서 수련받았다고 한다. 에리히 프롬과 롤로 메이는 알지만 아케렛은 몰랐다. 나는 그가 기반을 두고 있는 정신분석과 실존주의에 크게 관심이 없기도 했고, 아무리 상담학도라 한들 주요한 학자들과 자기가 좋아하거나 관심 있는 이론 · 연구 분야에나 빠삭하지 모두를 다 알 수는 없는 일이니까. 


  여하간 저자의 출생 연도 등을 고려했을 때 적어도 이 분야의 할아버지쯤 되시는 분이라는 건 알겠더라. 책은 은퇴를 앞둔 예순다섯의 나이에 불현듯 자신에게 상담을 받은 내담자들의 삶이 궁금해진 저자가 그들을 만나러 떠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각 챕터는 저자의 내담자들과 상담을 받던 당시 그들의 삶의 이야기 그리고 저자가 30년이 지난 현재 만난 그들의 모습에 대해 다루고 있다. 상담이 진행되던 시점은 지금 보다 더 몇십 년 전 뒤고, 저자가 만난 내담자들의 '현재' 삶도 2020년 책을 읽고 있는 내 기준에서는 적어도 20년 전의 과거이다─해당 책은 미국에서 1995년 「Tales From a Traveling Couch」이라는 제목으로 첫 출간되었다─. 


  처음에는 시간대의 차이나 어쩐지 조금 극적이고 과장되어 있는, 드라마틱하게 전개되는 흡사 소설을 읽는 듯한 미국 할아버지 에세이 특유의 문장들이 좀 거슬리긴 했지만 내담자의 이야기들이 재생되고 상담 과정 중간에서 저자가 직면하게 되는 고민들(성적으로 유혹적인 내담자, 내담자의 비의도적 자살 행위와 이를 저지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내담자의 시험적인 질문들에 어떻게 응답해서 그 시련을 무사히 넘기고 그와 라포를 형성할 수 있을까ㅠㅠ)이 우후죽순으로 터져 나오며 자연스레 몰입하게 되었다. 


  그래서 30년 후 저자의 내담자들은 모두 행복했을까? 모두가 저자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선생님 덕분에 내 인생이 이렇게 바뀌었다고 말할까? 저자 또한 내담자를 만나러 다니면서 그걸 고민한다. 어쩌면 나는 내담자들에게 '선생님 덕분에 인생이 바뀌었다'는 그런 류의 말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고. 그리고 번민한다. 상담의 결과로 생물학적으로 내담자를 숨 쉬게 했을지는 몰라도 그의 가장 애틋하고 열정적이었던 심리적인 에너지가 나와의 상담으로 인해 거세되어버렸다고 한다면. 나의 옛 내담자가 나와의 상담 이후에 자기 삶 그 자체를 살지 못하고 예술 작품을 만드는데 삶을 모두 쏟아버리며 우울증과 자살을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 상담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담자는 변화했고, 그로 인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저자가 내담자들을 만나며 되새기는 이러한 번민들은 내 것이기도 했다. 


  물론 저자도, 그리고 내담자들도 이야기한다. 한 개인의 변화와 삶에는 너무나 많은 요소들이 개입하기 나름이라고. 상담은 그중 하나에 지나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나 또한 일개 초심 상담자일 뿐이지만 그렇기에 내담자 삶의 변화가 있기를, 그가 행복해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상담자는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되새긴다. 나와의 상담만으로 그가 변화하고, 행복해지길 바라는 건 너무나 과대하고 전능한 기대와 꿈일 테니까. 


  물론 상담은 효과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과대하고 전능한 기대는 단순히 상담이 유의미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담자의 변화가 전적으로 내 몫이라는 불가한 열망을 의미한다. 이 말은 뒤집어보자면 내담자가 주관적으로 자기 삶에 만족하고 행복감을 느끼더라도 그마저도 전적으로 나 때문은 아니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는데 학부와 대학원에서 반쯤 흘려듣던 노老 교수님의 말씀이 가장 많이 생각났다. 자기 삶에 대해 내담자만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그 사람이야 말로 자기 삶의 전문가라고. 그러니 상담자가 폼을 잡을 일도, 훈계나 조언을 할 일은 더더욱 아니라는 말씀. 갓 대학에 들어갔을 땐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하고 시큰둥했는데 현장에 나와보니 가장 많이 떠오르는 말이기도 했다. 





덧1: 상담은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때로는 예술과 직관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과학적으로 상담이 도움이 되었는가를 증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에서, 특히 한국 사회에서 상담자들의 근무 여건과 처우 개선을 위해 상담자들이 갖춰야 할 무기라고 생각한다. 


덧2: 저자의 내담자들도 이 책이 발간된 이후에 봤을 텐데 그들의 감상도 궁금하다. 


덧3: 상담자인 나에겐 재미있었고, 주변의 나와 비슷한 연배와 경력의 다른 상담자들에게도 충분히 권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상담과 전혀 관련 없는 사람들이 봤을 땐 과연 재미있을까...? 개인적으로 10회기 이상의 장기 상담을 경험한 내담자들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것도 같다. 다만 국내에서 상담받기를 고민하며, 상담 회기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이 책보단 개인적으로 백세희 작가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가 더 나은 선택일 수도. 


덧4: 하지만 현실적으로 상담의 효과성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의 문제는 연구자와 실무자들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지점이 아닐 수 없다. 상담은 정량적으로 평가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호소만 할 게 아니라, 정량 평가가 어렵다면 그 효과성을 입증할 다른 대안들이 끊임없이 논의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는 결국 상담 시장의 확대와 복지 영역에서 상담 사업이 장기적인 안목에서 안정적인 예산을 수급받기 위해 그러할 것이다. 






내담자가 죽음에 이르는 사고로 인해, 혹은 계획적인 자살로 인해 생명을 잃을 위험에 처하면 자동으로 정신 질환자 보호 시설에 감금될 후보자가 된다. (중략) 감금을 하면 생명을 구할 수 있고, 역으로 내담자를 감금하지 못하면 내담자가 너무 일찍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p.95 찰스: 북극곰을 사랑한 남자 편.



"당신만의 느낌이라고요? 말해봐요, 아케렛 박사.  우리가 심리 치료를 할 때 그 외의 어떤 것을 판단의 근거로 삼아야 할까요? 신의 서명?"

p. 179 세스: 가학피학성애 공상에 시달리는 남자 편.  



"우리는 그 누구도 치료하는 게 아니에요. 내담자들이 스스로 치유하는 동안 우리는 가만히 기다리며 응원할 뿐이죠."

p. 206 세스: 가학피학성애 공상에 시달리는 남자 편.  



"당신이 하는 이 최종적인 추적 연구 말이에요. 당신이 우리를, 그러니까 당신의 내담자들을 실망시켰는지 알고 싶잖아요? 알아야만 하잖아요. 당신은 그걸 놓아버리지 못해요."

p. 227 세스: 가학피학성애 공상에 시달리는 남자 편.  



사실 우리 심리치료사들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일을 하기도 하지만, 치료법에 대한 생각을 떠나 고급스러운 입을 판별하는 감정가이다. 

p. 302 사샤: 작품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한 작가 편  



좋든 나쁘든 나는 늘 심리치료를 과학보다는 예술로, 나 자신을 교조적인 이론가라기보다는 서정적인 치료사로 여겼다. 그래서 나는 치료의 결과를 내가 다른 예술 작품을 평가할 때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평가하고 싶다. 즉 주관적으로, 직관적으로, 미학적으로, 상상력을 발휘해 평가하고, 그 평가를 맹신하고 싶다. 그러나 이러한 파악하기 힘든 맥락 내에서조차 치료의 결과를 평가하는 잣대가 명확하지 않음에도 나는 여전히 과학자들처럼 치료가 과연 도움이 되었는지의 여부를 알고 싶다. 더 나은 삶이 무엇을 의미하든 나에게 치료를 받았던 내담자들이 치료를 통해 '더 나은' 삶을 살게 되었을까? 

p. 371 에필로그: 최종 분석


매거진의 이전글 정세랑(2020), 목소리를 드릴게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