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즙 짜는 가게 / 한수남

by 한수남


지나가다 즙 짜는 가게를 보네

포도즙 양파즙 호박즙 배즙 사과즙

대체로 순한 것들, 여리고 물기가 많은 것들


만약, 나의 정신을 짠다면?

내 육체를 꽉 짠다면?

내 몸과 마음을 같이 쫘아악 쥐어짠다면?


조금 끔찍한 상상이 따라붙네

지나쳤던 그 가게로 다시 돌아와서

따랑, 문을 열고 들어서니

훅 끼쳐오는 엑기스의 진한 냄새


사장님, 저도 짤 수 있나요?

심란 우울 복잡한 제 머리통을 제 심장을 꾸욱 짜서

시원하게 비워주시면 안될까요?


마구 솟아오르는 말들을 꾸욱 눌렀네

이것저것 가격을 물어보고

다음에 오겠다는 허허로운 약속을 남기고


따라랑, 가게를 나오니 눈부신 햇살이 따라붙네

알 수 없는 주술이 나를 계속 따라 오더니

꽃가게 앞으로 나를 데려다놓네


빨간 꽃 파란 꽃 노란 꽃들이

아름다운 혁명처럼 나를 반기네

몸속의 즙을 다 퍼 올려 꽃으로 피운

저, 저, 강인한 식물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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