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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다쟁이 Aug 26. 2024

이처럼 사소한 것들

책을 읽고 누군가의 마음을 오래 지배한다는 건

그 책의 내용이 새롭거나  감동적이거나

혹은 아주 재미있거나 한 이야기이겠지만

클레이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란 작품은

내가 마치 주인공 펄롱이 된 듯 감정이 이입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만드는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한동안은 내가 마치 펄롱이 된 듯 번뇌하고,

왜 답답하게 시간을 끄는지 한탄하며,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같이 머물러 쓸쓸해하고, 동정 어린 마음으로 바라보고, 

그러다 알 수 없는 괴로움에  휩싸여 헤어 나오기 어려웠다.

키건은  그의 내면의 어딘가에 읽는 이를 데려다 놓고 잠시 외출하듯 떠나버리고 

독자는 어느샌가 펄롱이 되어있었다.




키건이 그린 그림은 어둡고 삭막한 밑그림 속에

먹을 것을 찾아 떠도는 개들이 그려지고  동물의 먹이를 핥아먹는 아이도 등장한다.  그것을 바라보는 펄롱의 마음은  쓸쓸하다 못해 슬픔으로 침잠했고,

스산한 한 폭의 혹독한 겨울풍경으로 완성된 그림은 사실보다 더 사실적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실상은 더 처참했다.

1985년의 아일랜드는 심각한 경제위기에 빠져있었고, 사람들은 직장을 잃었으며, 회사는 문을 닫았고, 가게와 상점도 폐업을 했다.

심지어는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는 이들도 있었다.

더 이상 뒤돌아볼 수 없는 주변환경이 펄롱의 마음을 괴롭히면서도

마음속 다른 한편으론 지금의 평탄한 삶을 유지시켜야 한다는  마음이 굳혀지기도 했다.


하지만 펄롱의 시선은 자꾸  힘든 사람들에 꽂히고,

그가 자랐던 어린 시절로 펄롱을 데려다 놓았다. 


펄롱의 엄마는 어린 미혼모였다.

가족들도 외면한 열여섯 살 소녀를 거둔 것은 소녀를 일꾼으로 부리는 미시즈 윌슨이라는 주인집 부인이었다. 부인은 소녀를 병원에 데려가주고

다시 그 둘을(펄롱과 엄마) 집으로 데려왔다.

아기였던 펄롱은 미시즈 부인의 부엌에서 자랐지만

부인의 돌봄과 배려를 받으며 자랄 수 있었고,

그녀에게 글도 배울 수 있었다.

펄롱의 탄생은 아일랜드의 경제대공황처럼 가혹했지만

윌슨부인은 벌거벗은 펄롱에게  

따뜻한 바람막이가 되어주었다.

아주 사소한 것들로..

하지만 이런 사소한 것들은 펄롱의 내면에 아주 깊게 자리 잡았고,

그가 앞으로 헤쳐나갈 고민과 행동에 큰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어느 날 펄롱은 어린 시절

미시즈 윌슨 부인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생각했다.

펄롱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던 <크리스마스 캐럴> 이란 책은 펄롱이 알지 못하게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삶에 대한 커다란 도덕적 가르침을 갖게 했고, 변화하지 않는 삶에  대한 의미에 대한 물음표를 던졌다.


 p44

 "어둠 속에서 잠에서 깨어 똑같은 것을  또다시 마주하는 것, 아무것도 달라지지도 바뀌지도 새로워지지도 않는 걸까, 아일린과 딸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

똑같은 일이 날이면 날마다 여름 내내 반복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석탄 야적장에서 일을 하는 펄롱은

언덕 위에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은 수녀원으로

배달을 가게 된다. 수녀원에  관해 떠도는 소문은 많았지만(타락한 여자들이 교화를 받는 곳이라는..

어떤 이는 그냥 모자 보호소라는..) 그건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무성한 소문의 수녀원에서 그가 맞닥뜨린 모습은 참혹했다. 어린아이들은 겁에 질려있거나 혹은  강에 빠져 죽을 만큼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런 아이들을 모른척하고 나와야 했던 펄롱은 자신이 가야 할 삶의 방향을 잃는다.

그리고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미시즈부인이 아니었으면 자신의 어머니와

자신은 지금 어디에 있었을까? 하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일요일 새벽

펄롱은 또다시 수녀원으로 배달을 나가야 했다.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을 한편에 묻고..

평온한 삶의 유혹은 마음속의 악마처럼 펄롱을  괴롭혔지만 운명처럼 펄롱은 자신과 만나러 가는 기분을 느꼈다.


이른 아침 수녀원의  석탄 광은 닫혀 있었고, 그 문 안에서 펄롱은 며칠째 갇혀 있는 소녀와 맞닥뜨린다. 소녀의 배설물과 함께..

그리고 암묵적으로 수녀원장과 대립하게 된다.

마음속에는 늘 도망가고픈 마음과  꾸역꾸역 버텨온 시간이 함께했지만 결국엔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뒤 돌아 나오게 된다.


크리스마스이브에 펄롱은 한 해의 일을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자꾸만 주변을 배회하게 된다. 마음속에는 커다란 불안감이 자리 잡았지만

길을 잃었던 곳에서 만났던 기인한 노인의 말이

펄롱에게 용기를 주었다.


"이 길은 어디든 가고 픈대로 데려다줄 것이라고.."


펄롱은 수녀원의 석탄 광 속의 소녀를 데리고 나와 집을 향해 걸었다. 대부분은  반갑게 펄롱을 아는 척했지만

어떤 이는 멀찌감치 펄롱은 피해 가거나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그렇지만 펄롱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하고 기쁨이 솟았다. 그리고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맞이한 것 같았다.




펄롱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아주 평범한 소시민.. 가정을 예쁘게 꾸려가는 성실한 가장..

우리 주변의 모습이다.

그래서 그가 가졌던 인간적인 고뇌가 더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그의 행동으로 인해

그의 가정은 무너질지 모른다.

그의 딸들은 평탄하게 자랄 수 을지도 모른다.

그는 직장을 잃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이민을 가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을 접어두고 그가 세라를

데리고 나올 수 있었던 마음을 갖게 한 건

미시즈 윌슨이 그에게 베풀었던 사소한 일들 때문이었다.


P120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큰 일은 특별한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고

사소한 일은 매 순간순간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 순간순간이 그 사람의 일상이 되고

삶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그 사소함이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결코

사소함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뭉클했던

미시즈 윌슨의 사소한 배려와

펄롱의 대단한 용기가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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