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작가의 <단 한 번의 삶>을 읽으면서
문득 내가 가진 삶의 의미에 질문을 던졌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조금 더 길게 대답을 한다면
지금 현재보다는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
현재를 열심히 살아내는 것?
또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
주어진 삶에 순응하는 것?
그 어떤 대답도 썩 마음에 들진 않는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그리고 왜 살아야 하나를
고민해 본 건 사춘기시절의 어느 지점이었다.
안갯속을 나 혼자 허우적대며 버둥거리는 느낌이랄까? 모든 게 막연하고 불안한 시절.
삶이라는 어마무시한 숙제를 20대 안에 다 끝내야 한다는 강박
그 강박으로 인해 오히려 넋을 놓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날들
결국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지나가는 시간들 속에..
아~~ 삶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가기도 하고
내 의지로 변화시킬 수 있는 부분은 그리 크지도
않다는 걸 30대 중반쯤엔 깨달았던 것 같다.
그 이후로는
왜 사는지에 대한
물음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나의 선택보다는 운명의 수레바퀴가
더 강하게 나를 끌어당기고 있다는 생각이 지배했기 때문에..
이를테면 어떤 부모를 만나는지
어떤 성격을 가지고 태어나는지
살다가 어떤 비껴갈 수 없는
사건을 겪는다든지 하는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들은 아니었다.
그렇게 살아가다 조금은 버겁다고 느끼고
가끔은 행복하다고 느끼고
때로는 좌절하기도 하며 절망에 가까운 심정으로 신을 원망하기도 했던 적도 있다.
그 수레바퀴는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끊임없이 굴러가야만 한다고 느꼈고,
그런 20대 30대를 지나 오십 대가 되어보니
그 수레바퀴의 속도는 느려지고
삶이라는 고단함의 의미가 마음에 새겨지는
나이가 돼 버렸다.
꽃길만 걸으세요~~
라는 덕담이 유행처럼 번지지만
삶의 수레바퀴는 꽃길만 걸을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닐까 하고
피식 웃음 짓는 여유도 생긴 것 같다.
삶은
가다가 빗길을 만나 미끄러지기도 하고
혹은 돌부리에 걸려 쿨렁거릴 때도 있고,
때론 진흙탕 속에 빠져
앞으로도 뒤로도 옴짝달싹 할 수 없을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간신히 그 진흙탕을
빠져나와 흙이 묻은 채로 터덜터덜 가다 보면
어느새 또 따뜻한 햇살과 단 비를 만나
언제 그랬냐는 듯 낡은 수레바퀴는
멀쩡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나이에 내가 보는 삶은 그렇게 완벽하지 않아도 되고
조금은 누추하거나 초라해 보여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누가 물어보면 빈티지를 좋아한다고
얘기하면 되고,
또 누가 그렇게 물어볼 사람도 없다.^^
하지만 나의 삶에도
늘 후회와 반성은 남는다.
"그때 그랬을 걸!"
하는 아쉬움과 자책으로 꽉 찬 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난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은 삶을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나로 아닌 다른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모를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나는 이런저런 선택의 순간에
나는 내 나름의 최선을 다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후회와 자책은 의미 없는 일일 수도
있다.
산다는 건
의미를 찾기보단
나에게 주어진 삶을
슬기롭게 잘 헤쳐나가는 일 같다.
버거우면 잠시 쉬기도 하고
억울한 마음이 들면 즐기기도 하면서
좀 모자라거나 부족한 부분엔 말줄임표를
찍으며 아쉬움이 남아야
조금은 인간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사공이 없는 나룻배가 닿는 곳
대체로 젊을 때는 확실한 게 거의 없어서 힘들고, 늙어서는 확실한 것밖에 없어서 괴롭다. 확실한 게 거의 없는데도 젊은이는 제한된 선택지 안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잘 모르는 채로 인생의 중요한 결정들을 내려야만 한다.
무한대에 가까운 가능성이 오히려 판단을 어렵게 하는데,
이렇게 내려진 결정들이 모여 확실성만 남아 있는, 더는 아무것도 바꿀 게 없는 미래가 된다.
청춘의 불안은 여기서 비롯된다.(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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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 없는 나룻배가 기슭에 닿듯 살다 보면 도달하게 되는 어딘가. 그게 미래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온다.
먼 미래에 도달하면 모두가 하는 일이 있다.
결말에 맞춰 과거의 서사를 다시 쓰는 것이다.
(p143)
김영하작가의 <단 한 번의 삶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