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요즘 가끔 투닥인다.
문제는 주로 외모 치장에 관한 일이다.
아이는 반바지나 치마를 짧게 입으려 하고
나는 학생다운 걸 추천한다
그리고 너무 과하지 않은 패션을 이야기한다.
아이의 관점의 적당함과 나의 관점의 적당함엔
약 5센티 정도의 차이가 있다.
나는 너무 짧게 입으면 시선을 끌게 되고
야하게 보이며 여자로서의 위험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아이는 어정쩡한 길이의 촌스러움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그 5센티의 간극은 늘 말싸움으로 번져
서로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
화장도 그렇다.
가끔 풀 메이크업을 한 학생들을 볼 때가 있다.
그리고 간혹은 선크림도 바르지 않은 풋풋해 보이는 학생들을 마주칠 때도 있다.
내 눈에는 당연 후자가 더 학생답고 예뻐 보인다.
어려 보이는 얼굴에 과한 메이크업은 이상하게 촌스러워 보이고 낯설게 느껴진다.
사춘기를 지나는 내 아이도 슬슬 화장에 관심을 갖는다.
나는 피부가 깨끗한 데 왜 화장을 하지?
선크림정도만 바르면 되지 않아? 하는 의견이고,
아이는 좀 더 뽀얗고 예뻐 보이는 쪽으로
의견을 낸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
"요즘 화장 안 하는 친구는 거의 없어~"
반에 한두 명 빼고는 다 적당히 메이크업을 한다고
토로를 한다.
맞는 말이지만 그냥 내 아이는 주변환경에 많이 휩쓸리지 않고 사춘기라는 수레를 타더라도
덜 덜컹거리며 덜 흔들리며 가기를 바래본다.
그러다 문득 생각을 한다.
뭣이 중한데?
결국은 아이의 생각을 받아들이되
너무 과하지 않게만 하고 다니라는 선에서 합의를 본다. 말싸움에 지친 나는 때론 포기와 가깝게 말을 해버리지만
어쩌면 그것은 내가 아이의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는 것은 아닌지 또 고민에 빠지게 한다.
어떤 선택에 무엇이 옳고 틀린 건 없다
나를 드러냄에 있어서도 어느 만큼이 적당하다고는 누구도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내 아이가 무턱대고 다른 사람의 모습을 따라 하고,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 쓰고,
다른 사람에 기준이 맞추어지지 않았음 하는 바람은 있다.
다른 사람들이 다 해서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것이라서 선택할 수 있는
기준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도 문득 머리 한 편으로는 떠올려지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번진다.
오늘도 나는 엄마로서 선을 또 넘었다!
'타자를 나의 것으로 만들지 말고 그가 있는 그대로 있게 하라.'
타자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게 사랑이고,
그 자리가 윤리의 출발점이라네. 타자를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위해 왜곡해서는 안 돼.
...
우리는 영원히 타인을 모르는 거야. 안다고 착각할 뿐. 내가 어머니를 아무리 사랑해도
어머니와 나 사이에는 얇은 막이 있어. 절대로
어머니는 내가 될 수 없고 나는 어머니가 될 수 없어. 목숨보다 더 사랑해도 어머니와 나의
고통은 별개라네. 존재와 존재 사이에 쳐진 엷은 막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위선을 떨지.'내가 너일 수 있는 것'처럼
(이어령 마지막 수업-p122)
(이미지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