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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동안 별 볼 일 없는 여자

by 수다쟁이

그녀는 제사 준비가 끝난 웃풍이 도는 작은 방에 누워 나를 항상 그렇게 표현했다.


"서방님이 대단한 여자랑 결혼할 줄 알았는데

그 뭐랄까.. 그런 거 있잖아! 어머님이 너무 실망을 하셔서..

동서가 그렇잖아.. 별로 내세울 게 없어서 (보잘것이 없어서)

어머님 마음에 안 드니 그렇게 함부로 하는 거야!"

그녀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나는 시집올 때 2천만 원 가지고 와서 전세를 얻고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반대를 하셨는데..

나는 제사란 것도 모르고 시집을 왔어

그런데 지금은 제사를 1년에 명절까지 9번 모시고

살았잖아!"


그녀의 이야기는 나를 폄하하는 것으로

시작해 결국은 자신의 대단함과 희생과

자신과 같은 여자가 없다는 무용담으로 이어졌다.


처음엔 어이없기도 하고,

도대체 뭐지? 하고 속으로 웃음 짓기도 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는 난생처음 겪는 어리둥절한

경험이었고 나는 시집을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댁이었다.


어이없는 다른 한편으론 그녀를 이해하는 마음도 있었다.

시댁에서 해야 하는 많은 일과

노동에 대한 투정이 저런 식으로 발현이 되나?

또 한편으론 새로 시집온 동서에게 나름

윗사람으로서의 위신을 세우고 싶은 마음이 너무 앞섰나? 하고..


그러고도 10여 년의 시간 동안 명절이면 우리는 작은방에 누워 등짝이 무너질 것 같은 힘겨운 몸을 누이고 불평불만을 나누었다.

그런 사이사이 그녀는

시어머니의 퉁박이 나에게 전해지면

늘 나를 보잘것없는 여자로 만들며 위로인 듯 위로가 아닌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녀의 말속에서 나는 늘 일을 잘 못하는 여자였고, 인물이 형편없었으며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는 능력 없는 보잘것없는 여자였다.

내가 시어머니에게 모욕스런 일을 겪는 것은

당연한 듯 포장되어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이런 모욕감은 말로 담기에는

부끄러울 정도의 기분이 들게 했고,

돌아가신 우리 엄마가 들으셨다면

아마 무덤을 헤치고 뛰쳐나왔겠다는 생각마저 들게 만들 정도였다.


시집온 첫 해 그녀는

시아버님의 첫제사를 혼자 다 준비하라고 했다. 그것은 이 집의 가풍이라고 했다.

'한 두 번 본 제사를 내가? 그것도 혼자?

손님들도 오시는데?'

남편은 여태껏 해오신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해야지 어떻게 해?라는 말 외엔 어떤 반박이나

또 다른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새벽 6시 차를 타고 대구에 10시가 안돼 도착해 장을 보고, 처음이라 음식을 혼자 할 수 없으니

도와주실 수 있냐고 간곡히 부탁을 해서

아버님의 첫제사는 그냥저냥 넘길 수 있었다.

제사를 모시고 어머님께 여쭤보니

그런 규율이 있었나? 하고 자신은 잘 모르겠다고

하셨다.


그 이후로도 시집온 첫해 제사와 명절 7번은

다 참석해야 한다는 가풍때문에

남편은 가지 못하는 평일 제사는 혼자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가야만 했다.

멋모르던 시절의 시댁은 그저 낯설고 어려웠고,

그 집안의 문화를 따르는 일은 나를 많이 내려놓아야 하는 일이었다.


그녀가 시댁의 많은 집안일을 감당할수록

그 위세는 만만치 않았다.

39의 나이에 임신 8개월이 지난 어느 날

그녀는 나에게 얘기했다.

"이번 어버이날은 내려와서

할머니 제사까지 지내고 가~~"

어버이날 며칠 뒤에 할머님 제사가 있었고,

남편은 서울로 올라가고

나는 대구에 혼자남아 제사까지 지내고 가란 말씀이셨다.


처음으로 남편은 나를 대신해 그녀에게 말을 했다.

"곧 출산이고 노산인데 내려갈 때는 같이 가도

올라올 때는 어찌 혼자 올 수 있냐?"라고 반박했다.

중간에서 듣고 계신 어머님이 곧 출산을 앞두고 있으니

이번에는 그냥 내려오지 말라고 처음으로 편에 서서 말씀해 주셨다.

아이를 둘이나 낳아본 그녀가 나에게 그렇게 모질 수가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지금도 나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출산을 하고 디스크통증이 너무 고통스러워

시댁 제사에 못 내려간다 할 때도

그녀는 시어머님을 핑계로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괜찮은데 어머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네..

동서를 별로 마음에 안 들어하시는 데 아프다고까지 하니 좋아하시겠어?"


번번이 나는 할 말을 잃었고, 그렇다고

뭐라고 반박하기도 귀찮았다.

내가 살아온 생각과 방식이 있듯

사람마다 생각하는 방식은 다르고

그녀의 생각을 내가 바꾸긴 어렵다고 느꼈다.


그녀가 좋지는 않았지만 나는 나보다 며느리로서 더 많은 일을

감당해야 하는 그녀의 노고는 인정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성에는 차지 않았겠지만 말로는 무한정 그녀의 노고를 인정했고

가끔 그녀에게 작은 선물을 전하기도 했다.


멀리 있어 모든 제사를 다 참석할 수는 없었지만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님 제사는 참석하려고

아이와 둘이 기차에 오른 적도 많았다.

아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때는 제사 때문에 현장학습을 내고 내려가기도 했다.

어느 누구보다도 형님 혼자 힘드실까 봐 걱정하는 나의 작은 마음이었다.


매해 설날에는 조카들의 세뱃돈에 짧은 편지와 함께 세뱃돈을 담았다.

조카들이 학교를 입학하거나 졸업할 때에도

수능시험을 볼 때도

군대를 가거나 휴가를 나올 때에도 그녀의 노고에 대한 위로를 담아 조그맣게라도 성의표시를 했다.

내가 그녀에게 전할 수 있는 작은 마음의 표현이었고, 시집살이의 힘듦에 대한 동료애이기도 했다.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시집살이에 대한 팽팽한 동아줄은 많이 헐거워졌고,

집안 행사도 많이 줄기도 했다.

세월에 묻히듯 감정의 노여움의 색깔은 흐릿해지고

상처의 흔적은 허무함으로 묻히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나는 그녀와

전화로 잠시 과거를 이야기했다.

오래전 일들이 힘겨웠더라도 서로에게 최선을 다한 시간으로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고,

누군가에게 부당하거나 억울했던 일도 빛바랜 추억으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나에게

그녀는 다시 그런 말을 전했다.

"동서가 쫌 그런 게 있잖아?

쫌 그런 게 있어서 어머님이 그렇게 막 퍼부우셨잖아!"


"쫌 그런 게 뭔데요? 형님?

조건이 별로라는 말씀하시는 거죠?"


"맞아!

동서가 좀 그렇잖아!"

나는 어리석게도 목소리를 높여 나의 조건과 남편의 조건을 비교해서 반박하기 시작했다.


어머님이 나에게 시집살이를 시킨 이유에

빚대어 그녀는 나를 아직도 별 볼일 없는 여자로

얘기하고 있었다.

20년이란 시간이 지나고

20년이란 시간 동안 나를 지켜본 사람이..


나의 작은 위로는 그녀에게 별 것 아닐 수 있을 같다.

그리고 그녀가 생각하는 나는 어쩌면 별 볼 일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20년이란 세월 동안

나를 지켜보고 나의 선의의 말과 노고에 대한 위로가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닿았다면

지금 그녀는 나에게

"동서가 쫌 그런 게 있잖아! "란 표현을 할 수 있을까?


엄밀히 따지면 그녀는

남편의 어머니도 아니고

남편의 형제도 아니다.

솔직히 어느 누가 나를 그녀의 맘대로

재단하라고 허락해 준 적이 있는가?

동료애마저도 쓰레기통에 처박힌 느낌이 들었다.


어느 가을날

나는 그렇게 그녀와의 20년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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