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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만지다 -이봉희-

--아파하는 모든 이들에게--

by 수다쟁이

삶이란 무엇일까?

인생이란 무엇일까?

과연 운명이란 있는 걸까?

나는 지금 난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어릴 적엔 막연했고, 철이 든 후론 나에게 맞닥뜨린 아픔을 겪으며 또는 누군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며 이런 답이 없는 질문을 되뇌곤 했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나고,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사람과 소통하며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면

운명이랄까?

하지만 사람은 그런 관계 속에서 상처를 많이 받기도 한다.

때로는 그 상처 때문에 강해지기도 하지만

문제는 그 상처가 아픔으로 남을 때이다.

상처가 아픔으로 남을 때 사람들은 아픔을 드러내기보다는 아픔을 숨기게 되고

아픔을 숨기다 보니 외로워져 가고 병들게 된다.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누굴까를 생각해 보면

그건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 가까이 있기에 더 의지하게 되고

더 기대가 큰데 그런 의지와 기대를 져버린 배신감은 오히려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게 된다.


옆에 있는 누군가가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너무 아파하지 마"

이런 말 한마디로 아물 수 있는 상처를


"네가 이상한 거야~~ 네 잘못이네"라고

말하며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건 아닐까?


작가는 우리에게 모든 게 그럴 수도 있다고 조언한다. 하지만 별 것 아니라고도 말해준다.

마치 지친 마음에 따뜻한 차 한잔을 건네듯

담담한 위로를 전한다.




(내 마음을 만지다)를 읽으며 나는 나에게 둘러싸인 상처를 되짚어보았다. 다행인 건 나는 서른이 넘고서는 나의 상처를 묻어두고 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어릴 적엔 내 얘기를 아무에게도 꺼내지 않았던

참 조용하고 내성적인 아이였다면 오히려 성인이 되고 나서는

내 곁에 있었던 친구들을 붙들고 내 이야기를 많이 했던 거 같다. 나에겐 다행히 나를 구원해 줬던 친구들이 있었고, 말을 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건 적어도 내가 깊은 슬픔으로 빠지지 않게 했다. 그런 수다가 내 삶의 탈출구였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난 지금 우울증에

걸려있거나 화병에 걸려 죽어있을 수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결혼하기 전의 나의 아픔은 삶과 죽음에 관한 문제였다.

아버지의 죽음은 주변 사람들로 인해 엄마를 병들게 했고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상처를 치유할 방법을 찾지 못해 혼자 병들어가고 있었다.

아직 철이 덜든 우리는 엄마의 그런 상처를 가볍게 생각하거나 아픔을 같이 공유하지 못했었고,

너무 많이 아파해서 오히려 외면하려고 했던 것도 같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거니..

아니면 내 할 일을 묵묵히 하다 보면 아픔은 치유가 되겠지.. 하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말이다.

그리고 엄마는 그 후로 몇 년 뒤 쓰러지셔 긴긴 병마와 싸워야 했다.

긴 터널은 빠져나올 희망이 보이는 어둠이지만

엄마의 병은 탄광 속의 마차를 타고 깊은 굴로 들어가는 갑갑하고 두려운 싸움이었다.

희망을 캐고자 열심히 삽질을 했지만 건져 올린 건 아픔과 좌절이었다.


바깥 생활과 단절된 날들은 너무 엉켜버려

더 이상 풀 수없는 실타래를 방안 가득 끓어 안고 끙끙대는 꿈을 계속 꾸는 하루였고,

힘들다는 이유로 나의 삶도 같이 정지되었던 나는

어리석게도 그 시간들과 잘 지내지 못했다.




그리고 8년 후 난 덩그러니 혼자 남게 되었다.

어쩌면 그토록 바라던 자유였지만 내가 바깥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지하철에서 버스카드를 대고 지하철 게이트를 통과해야 하는 게 너무 이상하고 뻘쭘했던 순간들도 많았다.

그만큼 세상은 변해있었고, 나는 걸음마를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나 자신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티를 낼 수 없었다. 아마 좀 모자라 보일까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모자라 보이지 않으려고 나는 어색하고 두려운 맘으로 학원 일을 시작했고 그동안 해보지 못했던

여러 가지 일에 도전도 했었다.

하지만 마음속에 차지 않는 공허감이 늘 존재했었다.

그건 누구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아픔이었다.

내 삶의 끈이 없어졌다는 것.

그걸 받아들이는 시간이 나에겐 힘들고 외로웠다.


그때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던 거 같다.

"내가 예쁜 옷을 사서 입어도 누구한테

"이 옷 어때?"하고 물어보거나 자랑할 사람이 없다는 건 참 슬픈 일이야.

외로움이 슬픈 일이라는 건 엄마가 돌아가시고 처음 느낀 아픔이었다.




나의 이런 상황을 눈치챘던 친구는 나에게 가끔 소개팅을 주선했다. 그리고 나는 3년 후쯤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은 새로운 희망을 품기에 충분했고,

앞으로 나에겐 꽃길만 있을 거라는 벅찬 감정이 솟구치기도 했다. 하지만 나에게 결혼은 시작하기도 전에 아픔이 되었다.


부모의 부재라는 이유로, 또는 전문직종이 아니라는 이유로 시어머니는 나를 별로 탐탁지 않아 했고, 나 나름대로 열심히 착하게 살아온

나의 이력은 내세울게 아무것도 없었다.

격렬한 반대는 없었지만 당신의 아들이 더 잘나 보이는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는 살면서 불쑥불쑥 나의 자존감을 흔들었다.

(어찌 보면 혼주석에 앉을 사람이 마땅찮아 엄마에게 상처를 준 친척 어른들께 어렵사리 결혼식에 참석해 달라는 말을 꺼낼 때부터 나의 자존감은 이미 무너졌는지도 모르겠다.

아! 이 결혼을 꼭 해야 하나?

부탁을 하고 돌아오는 내내 이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아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외로움과

남편에 대한 마음이 더 무겁게 기울어졌고,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딸을 향한

돌아가신 엄마의 자부심의 말("나는 우리 딸이 잘났다고 생각한다.")을 간직한 채 어려운 순간들을 상황의 흐름에 내맡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나의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일은 이어졌고, 가끔은 나의 선택에 대한 어리석음을 원망하기도 했었다.

삶이란 내 뜻대로 되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미로 같은 지도라고 느껴졌다.




그리고 나에게 찾아온 세 번째 아픔은 육체적인 고통이었다. 늦은 나이에 자연분만으로 아이를 낳은 기쁨을 느낄 수도 없이

아이를 낳고 난 후 나의 허리디스크 통증은 계속되었다.

짐작건대 나의 허리는 이미 20대 때 망가져버렸던 거 같다. 디스크로 눌린 엉치뼈가 계속 심하게 아파왔고, 내 몸은 육아로 인해

목까지 굳어가다가 결국은 디스크가 터져버렸다.


통증 때문에 아침마다 두 시간씩 기어 다니길 6개월쯤 되었을 때,

통증 때문에 10분도 잠을 자질 못할 때쯤

나는 대학병원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

"제발 빨리 수술 좀 시켜주세요" 하고 매달렸다.

아이가 28개월 때의 일이다.

내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나의 아기도 그즈음엔 살아남은 사람들의 몫이라 여겨졌다.

통증 때문에 자살하고 싶은 사람의 심정을

나는 조금은 알 거 같았다.

육체적 고통은 다른 사람이 절대로 알 수가 없다는 뼈저리게 느끼는 시간이었다.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어도

내가 해야 될 일만을 요구하는 시어머님과 형님은 나를 더 절망스럽게 했던 거 같다.

그때 다시 한번 내 삶은 왜 이런가 하고 원망스러웠다.


사람은 어쩜 혼자 태어나 혼자 아픔을 겪고 혼자 땅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구나! 하는 깨달음은

내가 두려움 없이 수술실을 들어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수술실 대기장에서 나이 드신 할머니 한분이 너무 떨고 계시기에 그분을 위로해 드린 기억이 난다.

"너무 떨지 마세요. 별일 없이 금방 끝날 거예요.."

고통 앞에선 죽음도 두렵지 않다는 생각을 했던 순간이었다.




지금 나는 이런저런 아픔의 시간들을 이겨내고 오늘을 살고 있다. 아마 더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도 오늘을 살아내고 있을 것이다.

아픔의 순간들을 돌이켜보며 나는 내 인생에 그런 힘들었던 시간들이 있었나 싶게

먼 기억의 일들을 들추어내려고 노력했다.


간혹 아픔으로 굳어진 것도 있고, 이런저런 후회와 안타까움도 있지만, 시간의 힘이 그런 아픔들을 위로해 준 것인지, 아님 억지로 툭툭 털어내 버리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 것인지

그렇게 많은 상처가 머물러 있지는 않다.


확실한 건 나는 내가 받았던 상처, 나에게 상처를 줬던 사람들을 어느 정도 잊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내가 받은 상처를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고 수다로 풀려했던 게 도움이 됐던 것 같기도 하고,

가끔은 나에게 '너는 바보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름 최선을 다했었어'라고 위로해주기도 하고, 나에게 상처를 줬던 사람들에겐 그들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겠지.. 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려고도 한다.

그리고 나와는 너무 동떨어진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겐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니 내버려 두자.

내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 하고

나를 추스리기도 한다.

그리고 살다가 막 화가 나는 상황에 부딪히면

안 듣는데서 실컷 욕을 퍼붓기도 한다.

'어디 얼마나 잘 사나 보자 '

'네가 손해지 내가 손해냐 '하는 식으로

맘속으로 나쁜 말을 내던지도 한다.


살면서 아픔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어쩜 모두 이런저런 아픔을 겪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런 아픔은 더 이상 나에겐 오지 않기를 기도하기도 한다. 아프다는 게 어떤 건지를 알기에 더 두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아팠던 만큼 내 마음은 한 뼘 더 자라나 있기도 하다.

그렇게 자란 마음은 내 주변을 둘러보게도 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도 하고, 또 다른 예쁜 빛깔의 마음이 생기게도 한다. 어린 왕자를 사랑한 여우의 밀밭의 색깔처럼 말이다.




문득 내 친구가 떠올랐다.

그녀는 스물다섯의 꽃다운 나이에 전신마비 엄마를 병간호하고 있다.

세월은 이미 30년이 지났다.

그녀의 삶을 알지만 나는 그녀의 고통을

감히 짐작할 수 없다.

아마 그녀는 이미 마음의 문을 닫고 살거나

아니면 정문이 아닌 또 다른 문을 열고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녀의 창가에 모차르트 음악을 들려주고 싶다.

그녀가 책 속의 누군가처럼

한곡의 음악을 통해 잠시라도 덜 아프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고 살아가는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

어제의 햇살과 오늘의 햇살은 분명히 다르게

다가올 거라 믿으며..


세계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생전에 그의 그림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물감을 살 돈이 없을 만큼
비참한 삶을 살았던 그는 "인생은 고통의 드라마"
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신념과 열정을 따르며 살았습니다. 그를 품을 수 없어 세상은 그를 버렸지만 그는 그 세상을 버릴 수 없어서 차라리 자기 스스로를 버렸습니다. 처절하게 고독했던 위대한 화가는 쓸쓸하게 실패자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삶을 실패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불행은 실패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흐는 가장 불행했으나 가장 행복했던 사람입니다.
현재 나의 삶이 실패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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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크뤼커가《달빛을 쫓는 사람》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이미 그곳,/영영 눈길 미치지 못할/
그곳에 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진정 믿음과 신념을 가지고 좀 더 높고 넓은 영원의 시각으로 나의 삶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나의 현재의 아픔과 고통이 거대한 우주의 무대에서 보면 그 누군가의 삶에 심어놓은 복의
씨앗일 수 있습니다. 지금 나의 삶이 불행하다고
결코 실패는 아닙니다. 내 인생의 연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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