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더 이상 설렐 것이 없는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이 덕분에 오랜만에 찾은 에버랜드에서 난데없이 마음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계절마다 다른 옷을 갈아입는 에버랜드의겨울 콘셉트는 눈이다. 온 세상이 겨울왕국처럼 눈사람으로 둘러싸여 마치 눈세상의 공주라도 된 것처럼 심드렁했던 나의 마음을흔들어놓았다.
시큰둥하고 설렐 것 없는 마음에 꿈에서 왕자님이라도 만날 것 같은 황홀감. 깨어버리면 꾸던 꿈을 놓쳐버릴까꿈인 줄 알면서도 깨고 싶지 않은 환상의 세계에들어가 다시 꿈을 꾸는 듯하다. 어쩌면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늘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며 사는지도 모르겠다.
눈 컨셉의 에버랜드
토끼의 해라 거대한 토끼가 많았다
사랑스런 판다
문을 열자마자 입장한 에버랜드에서 제일 먼저 발걸음을 옮긴 곳은 판다월드였다.
보는 내내 대나무를 먹고 있던 판다는 인형처럼 귀여움 그 자체였다. 엎드려 자고 있던 판다도
너무 웃겨서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이 나이에 동물구경이 뭐 그리 신기할까 싶었는데
오랜만에 보는 판다 앞에 마음은 이미 어린아이로돌아가 있었다.
호랑이는 언제 봐도 먼저 인사하고 악수라도 나누고 싶도록 멋지다.다른 동물들의 모습도 처음 보는 것처럼 마냥 신기해입을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얼굴엔 웃음이 한가득이다.
바위너구리
특히 요 녀석은 아무리 봐도 뾰로통한 게 장난기가 가득해 보인다. 쥐 같아 살짝 징그럽기도 했지만 뾰로통한 표정이 압권이라 귀엽기도 했다.
동물구경 후 아이는 놀이기구를 타고 싶어 했지만 겨울이라 운행을 하지 않는 것도 있었고, 또 너무 어지럽거나 무서운 건 엄마가 같이 못 타겠다고 미리 선언을 하고 온 터라 가볍게 탈 수 있는 기차와 돌아가는 놀이기구 한두 개만 타고 미리 예약해 둔 공연장으로 향했다. 에버랜드 공연은 언제 봐도 화려했는데 아직 코로나가 끝나지 않아서인지 예전보다는 규모가 축소된 인형극을 하고 있었다. 아이가 커서 이제는 좀 시시했던 공연이었지만가끔은 유치해지는 것도
젊어지는 것 같아 붙잡고 싶은 감정이다.
공연을 보다시선이앞 좌석에 머리가 하얗게 세신 노부부에게로갔다. 두 분만 같이 오셨을까? 아니면 손자들을 따라오셨을까?
궁금증과 함께 눈길이 자꾸 간다.
그러다 문득 십여 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결혼 후 처음 맞는 시어머님 생신은 칠순이었다.
우리는 집들이 겸 어머님생신을 신혼집 근처에서 하기로 했다. 저녁식사는 한정식으로 예약했고. 지방에서 올라오신 어머님은 하루이틀 집에 묵어가시기로 했다. 그런데 어머님이뜬금없이 본인의 생일날 에버랜드에 가고 싶다는 얘기를 하셨단다.
"해외여행이 아니라 에버랜드?"
좀 엉뚱했지만 아주 오래전 에버랜드에 와보셨던 기억을 더듬어 문득 그곳을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고 하셨다.
가족들과의여행은 따뜻한 봄으로 좀 미루고 아주버님과 형님들은 어머님 생신날 에버랜드에 모였다. 그날도 지금처럼 사파리도 구경하고 공연도 구경하면서 어머님은 즐거워하셨던 것 같다. 아침부터 저녁식사 전까지온종일을에버랜드에서 보낸 기억이 있다.
아주 추웠던 겨울이라 다들 추워했지만 어머님은 별로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다들 나이가 있으셔 놀이기구도 타지 않았는데
어머님은 마지막으로 롤링 X트레인이라는
기차를 탄다고 하셨다. 예전에 타보니 재밌었다고..
다들 말렸지만 예전에 타본 기억을 더듬으시며 자신 있게 줄을 서셨다.
놀이기구를 무서워하는 나는 아예 탈 엄두도 못 냈는데 칠순에 거꾸로 한 바퀴를 도는 놀이기구를 타신다는 어머님이 참 신기하고 대단해 보이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했다.
다행히 어머님은 무사히 잘 타고 나오시고
재밌다고하셨다. 다음날 코피를 약간 흘리시는 후유증을 겪었지만 말이다.
그날 나는 하루종일
"칠순 생일을 에버랜드에서??"
라는 의아한 물음표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었다.
그때의 기억이 머리가 하얗게 세신 노부부의 뒷모습에 오버랩되었다.어쩜 나도 머리가 하얗게 센 칠순의 나이에 에버랜드를 오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던 감정이 문득 오늘에 이해가 가는 걸 보면나도 어느덧 노년으로 가기 위한 출발점에 섰나 보다.
젊었을 때는 젊음이 부럽지 않았고 뒤돌아볼 마음이 없었는데 지금은 자꾸 젊음이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더 나이 들기 전에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야 할 것 같고,젊은 사람들이 하는 일을 같이 따라 하고 싶은 생각도 든다.하지만 머리나 몸이 잘 따라주지 않는다. 커피주문을 받는 직원이 빨리 말을 하면 외국말처럼 잠시 알아들을 수 없고, 어디 가나 키오스크로 주문해야 하는 시스템이 불편하게 느껴지고 낯설다. 문득문득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어머님은 칠순에 추억을 더듬는 것 외에 자신도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옛날에 했던 것을 지금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찾고, 아직은 젊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