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숫제 Mar 05. 2024

고르기아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고르기아스 등장]

(고르기아스) 프로타고라스가 나보다 나이는 많지만, 나야말로 모든 ‘소피스트의 아버지’입니다. 내 생각을 듣고 난 후 여러분은 이제 더는 철학을 배울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수고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 여행’은 여기까지입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철학은 나의 세 가지 주장으로 끝장났기 때문입니다.


첫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존재한다 하더라도 알 수 없다.

셋째, 알 수 있다 해도 전할 수 없다.     


(소피) 뭐가 끝났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또 이 세 문장은 도대체 무슨 뜻이죠?   

  

(고르기아스) 파르메니데스의 이야기가 기억납니까? 그는 존재는 하나(일자)다 혹은 하나(일자)가 존재한다, 존재는 영원하고, 변하지 않고, 분리되지 않는다고 말했지요.   

  

(소피) 네, 그랬죠. 그런데요?    

 

(고르기아스)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은 옳습니다. 존재는 하나(일자)입니다. 영원하고, 불변하고,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주장이 지닌 올바름은 여기까지입니다. 왜냐, 보십시오. 우리가 보는 자연은 어떻습니까? 자연이 파르메니데스가 말한 것처럼 영원합니까? 변하지 않습니까? 분리되지 않습니까?     


(필로) 아니죠. 자연은 영원하지 않고, 변하고, 분리되죠.   

  

(고르기아스) 그렇습니다. 존재는 하나이고, 영원하고, 불변하고, 분리되지 않지만, 자연은 여럿이고, 영원하지 않고, 변하고, 분리됩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자연이니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 나의 첫 번째 주장은 옳습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소피) 그게 그렇게 되나요….     


Zalo Kappa, gorgias 21, Painting, Oil on Paper, 170 x 110, 2019.


(필로) 고르기아스도 제논처럼 귀류법을 사용하고 있는 건가요? 

    

제논이 귀류법을 통해 상대방의 주장이 참이라고 가정한 후 그것의 모순을 끌어내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면, 고르기아스는 지금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을 동의하다가 도달한 엉뚱한 결론을 자신의 주장이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고르기아스가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주장이 담긴 책의 제목이 『있지 않은 것, 곧 자연에 대하여』입니다. 그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에 관한 설명은 동의하지만, 일자가 존재한다는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고 있죠. 고르기아스의 주장은 ‘일자가 존재한다’가 아니라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입니다. 즉,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입니다.     


고르기아스가 자연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해서 그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고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파르메니데스를 이용해 파르메니데스와 다른 주장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려고 한 것입니다. ‘존재가 일자라는 파르메니데스 말이 맞아. 그러니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 이런 식입니다.    

  

(소피) 비꼬는 것처럼 보이네요.  

  

(고르기아스) 철학이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지요. 철학이 아니라 논쟁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파르메니데스를 이겼듯이 말입니다. 자, 나의 두 번째 주장으로 넘어갑시다. ‘존재한다 하더라도 알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자연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자연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습니까?      


(데오) 자연은 존재하지 않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자연이라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그러면 존재하는 것에 대해선 알 수 없겠네요.    

 

(고르기아스) 그렇습니다. 무언가 존재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이제 세 번째 주장입니다. 마지막이 중요합니다. ‘알 수 있다 해도 전할 수 없다.’    

 

존재를 알 수 있다하더라도,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려면 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아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자연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자연을 어떻게 압니까?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자연을 압니다. 색깔과 소리를 압니다.  

   

그러나 눈이 소리를 알 수 있습니까? 귀가 색깔을 알 수 있습니까? 눈이 소리를 전달할 수 없고 귀가 색깔을 인식할 수 없듯이, 말은 자연을 전달할 수 없습니다. 혹여, 자신이 아는 것을 말로 전달했다고 해봅시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사람은 말을 전달한 사람의 생각과 똑같은 생각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예컨대, 여러분이 여기 에레크테이온 신전 남쪽 벽에 서 있는 여섯 여인의 조각상을 보았고, 그것을 여러분이 말로 표현해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여러분의 말을 들은 사람이 그 조각상을 모양을 여러분이 본 것과 똑같이 떠올릴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결국, 여러분은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필로) 고르기아스가 파르메니데스와 제논만큼 어려운데요.  

   

(고르기아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내가 말했듯이 내가 생각하는 것을 여러분에게 전달할 수 없으니까요.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합니다. 불쌍한 파르메니데스와 그의 시시한 제자가 전파하는 주장이 터무니없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걸 보여줄 뿐입니다.     


아울러, 참된 지식을 얻으려는 모든 철학적 시도가 실제로는 불가능함을 보여줄 뿐입니다. 내 목적을 이루었으니 이것으로 끝입니다. 이제 철학을 그만하세요. 세상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마음을 포기하십시오.

[고르기아스 퇴장]     


David Shear, Sophist, Painting, Acrylic on Canvas, 71.1 x 78.7, 2014.


고르기아스의 생각을 여러분이 받아들이기 쉽게 다시 말씀드릴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그의 세 문장을 이렇게 바꾸어보겠습니다. ‘존재’ 대신에 ‘진리’를 넣어보겠습니다.    

 

첫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진리가 존재한다 해도 그것을 알 수 없다.

셋째, 진리를 알 수 있다 해도 그것을 전달할 수 없다.    

 

어떤가요? 이해가 되나요? 동의할 수 있나요?     

 

(필로) 참된 지식을 얻으려는 철학의 시도가 불가능하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군요. 지금까지의 철학자들은 진리를 알고 싶어했고 나름의 가설을 세운 것인데 고르기아스는 진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네요. 진리가 없고, 알 수도 없고, 전달할 수 없다는 말이군요.    

 

파르메니데스와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지만 묘하게 파르메니데스와 겹치는 듯한 느낌도 드네요. 파르메니데스만큼 매력적인 철학자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파르메니데스는 건설하는 느낌이라면 고르기아스는 파괴하는 느낌입니다.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니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해방감이랄까 자유로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데오) 같은 소피스트이지만 프로타고라스와는 다르네요. 프로타고라스는 동의할 수 있었는데 고르기아스는 동의할 수가 없어요. 아니, 동의하면 안 될 것 같아요. 고르기아스가 매력적이긴 하지만 고르기아스처럼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열심히 철학자의 생각을 따라가며 자그마한 진리라도 찾으려고 애썼는데 갑자기 커다란 허무가 밀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요.     


파르메니데스를 반박하기가 어려워 누가 대신 반박해주길 바랐고, 고르기아스가 그걸 해줘서 고맙긴 했는데, 다시 고르기아스를 반박하고 싶어졌어요. 그렇지만 고르기아스의 생각이 꽤 설득력이 있어 반박할 수가 없어요.     


(소피) 파르메니데스처럼 고르기아스의 철학도 궤변이네요. 마음에 안 들어요. 저는 이런 철학자들이 너무 싫어요. 철학자라면 존재가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알려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배우고 싶어서 철학을 공부하는 건데 배울 게 없다고 그러잖아요. 그래도 고르기아스에게 딱 하나 얻은 것이 있다면, 말로써 전달이 안 된다는 이야기였어요.

이전 07화 프로타고라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