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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숫제 Mar 12. 2024

트라시마코스

정의란 강자의 이익입니다

다음 소피스트를 만나러 갑시다. 여기 아크로폴리스를 내려가서 슬슬 산책하듯 걸으면 제우스 신전이 나옵니다. 거기서 우리의 세 번째 소피스트이자 마지막 소피스트와의 대화를 이어가려고 합니다.     


(필로) 소피스트는 모두 세 명인가요?    

 

아닙니다. 꽤 많은 소피스트가 있습니다. 소피스트는 도시를 넘나들며 지식을 전파한 당시의 지식인이었습니다. 돈을 받고 가르침을 베풀고 저작도 많이 남겼죠. 생각보다 많은 소피스트가 활동했습니다. 유명한 소피스트만 꼽아도 열 대여섯 명 정도 꼽을 수 있습니다만, 이번 여행에서 그들을 다 만날 수 없으니 세 명의 소피스트만 만나기로 한 것입니다.   

  

(필로) 소피스트를 만나면서 철학의 방향이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전 철학자들은 자연, 만물, 세계, 뭐 이런 것들을 다뤘잖아요. 그런데 소피스트는 인간에 관해 이야기하니까요. 그런데 또 그렇다고 자연에 대해 전혀 다루지 않은 것도 아닌 것 같은데요.    

 

네, 그렇습니다. 소피스트들은 자연철학자들이 탐구했던 존재에 관한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문제를 상대주의적이거나 회의주의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철학의 방향을 바꾼 이유는 인간에게 주어진 현실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지금 만나러 가는 철학자 트라시마코스도 현실의 문제를 무척이나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입니다. ‘정의’의 문제에 관심이 있었거든요. 게다가 말솜씨가 뛰어나서 사람을 분노에 사로잡히게 한다거나 분노에 휩싸인 사람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데 능수능란했습니다. 마치 주문을 외워 사람을 홀리는 마술사처럼요.   

  

(소피) 소피스트들은 서로 고향이 다르던데, 트라시마코스는 아테네 사람인가요?      


아닙니다. 트라시마코스도 다른 지역 사람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칼케돈 지역 출신이죠. 지금은 튀르키예의 이스탄불 주에 해당됩니다. 아, 저기 기다리고 있네요. 반갑습니다. 트라시마코스. 


Jean Delville, Justice of the past, Painting, 121 × 90, 1914.


[트라시마코스 등장]

(트라시마코스) 반갑습니다. 아크로폴리스를 다녀왔다고요? 프로타고라스와 고르기아스도 만났고요? 그러면 나는 그들이 이야기하지 않은 이야기를 해야겠군요. 여러분이 얼마나 순진한지 테스트를 해보겠습니다. 정의란 무엇입니까?    

 

(소피) 약한 사람이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게 정의 아닌가요? 아니면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대접받는 거요.     


(트라시마코스) 그렇군요, 소피. 혹시 당신에게 유모가 있습니까?     


(소피) 아기를 돌보는 유모 말인가요? 이 나이에 유모가 있을리가요.    

 

(트라시마코스) 당신이 콧물을 찔찔 흘리고 있어서 유모가 닦아줘야 할 것 같은데, 없다니 안타깝군요. 

    

(소피) 뭐라고요?!     


(트라시마코스) 정의란 강자의 이익입니다. 평범한 사람에 비해 강하고 우월한 사람이 이익을 얻는 일이 정의란 말입니다. 국가를 통치하는 자에게는 이익을 가져다주지만, 그 통치에 복종하는 자에게는 해를 가져다주는 것이 정의입니다.     


자연을 보아도 그렇지 않습니까. 강한 동물이 약한 동물을 잡아먹습니다. 그렇게 해서 약한 동물은 목숨을 잃지만 강한 동물은 목숨을 이어가지요. 이것이 자연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정의입니다.     


약한 사람을 돕는다고요? 그건 이상적일 뿐만 아니라, 순진하고, 무용하고, 위험합니다. 어린아이처럼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필로) 약한 자를 돕는 일이 어리석은 일이라고요? 도저히 동의가 안 되네요. 약한 자를 돕는 것은 숭고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트라시마코스) 숭고한 일이요? 약한 자를 돕는 일이 왜 숭고한 일입니까? 신들이 그걸 숭고한 일이라고 가르쳐주기라도 했답니까? 신들은 인간의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가 매일같이 목격하는 불의한 일들을 가만히 둘 리 없지 않습니까? 현실을 보세요. 인간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으며 살고 있어요. 이게 정의입니다.   

  

그러니 정의는 숭고한 일이 아니에요. 정의는 그저 자연이 정해놓은 그대로 사는 일이고, 국가를 통치하는 자들이 만들어 놓은 법에 복종하는 일일 뿐입니다.   

  

(필로) 법을 지키는 게 정의라면 그게 어떻게 약한 자를 잡아먹는 일이 되는 겁니까? 법은 약한 자를 돕잖아요. 가치를 지키는 게 법이잖아요.     


(트라시마코스) 필로, 당신도 소피 못지않게 아주 고상하고 또 순진하군요. 법이 약한 자를 돕는다고요? 쯧쯧. 법은 강한 자를 위해 존재합니다. 강한 자에게 이익을 주는 게 법의 역할입니다. 법이 약한 자를 돕는다면 왜 이 세상에서 약한 자는 늘 약하고 강한 자는 늘 강한 겁니까? 그건 바로 법이 강한 자를 돌보기 때문입니다. 강한 자를 더 강하게, 약한 자를 더 약하게 만드는 게 법입니다. 아주 작은 부분만 보면 법이 약한 자를 돕는 것처럼 보여도 전체를 보면 법은 항상 강한 자에게 이득을 줍니다.

     

그러니까 법이 수호하는 가치라고 할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법을 뛰어넘는 정의라는 것은 없다고요. 정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강한 자들이 만들어 놓은 법을 따르는 일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법을 따르는 것은 강한 자를 위한 행동이지 약한 자를 위한 행동이 아닙니다. 

    

결국, 정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정의로우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란 불가능하죠. 정의로운 사람은 늘 손해를 봅니다. 정의로운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이득을 보는 경우를 본 적 있나요? 당연히 없겠지요. 정의는 항상 남에게 이득을 주니까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정의롭게 행동하려고 하지 마세요. 정의롭게 행동하는 것보다 불의를 행하는 게 낫습니다. 그게 여러분에게 이득이 될 거예요. 충분히 불의를 행한다면 여러분은 더 힘 있고, 더 자유롭고, 더 주인답게 될 것입니다. 불의는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에요. 불의는 깊이 숙고한 결과입니다.     


(데오) 정의란 존재하지 않는군요.    

 

(트라시마코스) 존재해도 상관없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의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힘이 곧 정의입니다.

[트라시마코스 퇴장]     


Abraham Solomon, Waiting for the Verdict, Oil paint on canvas, 1019 × 1273, 1857.


이로써 소피스트 세 사람을 모두 만났습니다. 어떤가요? 

    

(필로) 어떻게 이런 주장을 철학이라고 할 수 있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트라시마코스같은 철학자도 철학자라고 불러야 합니까? 법이 정의를 수호하지 않고, 정의는 다른 사람에게 이득을 줄 뿐이며, 따라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까지 만난 철학자 중에 가장 기분 나쁜 철학자였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 수 있는 거죠? 도저히 용납을 못 하겠네요. 같은 소피스트인데 프로타고라스나 고르기아스와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파르메니데스가 다시 생각났습니다. 좀 어렵기는 해도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은 건설적이에요. 고르기아스도 괜찮았고요. 파르메니데스가 철학을 시작하는 느낌이고 고르기아스는 철학을 끝내는 느낌이지만, 그래도 철학 같았어요.     


(데오) 겉으로 잘 보이진 않지만 트라시마코스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그만큼 트라시마코스가 현실을 잘 반영한 것이겠죠. 현실을 잘 반영했다고 해서 좋은 철학은 아니지만요. 

    

저는 트라시마코스에게 동의할 수 없어요. 그렇지만 트라시마코스가 틀렸다는 걸 보여줄 수도 없어요.  

    

소피스트 세 사람을 만나면서 철학의 방향이 많이 바뀌었다는 걸 느꼈어요. 세 사람 모두 요즘 사람들의 생각과 비슷한 것 같아요. 고르기아스와 트라시마코스에게는 반발심이 들었지만, 프로타고라스에게는 현자의 풍모가 비쳤어요. 사회적 유산을 인정하면서도 모든 인간의 다양성을 존중해주는 태도가 인상적이었어요. 

    

(소피) 저는 지금까지 만난 철학자 중에 트라시마코스가 제일 좋았어요. 속이 아주 시원했어요. 트라시마코스가 나쁘게 보여도 굉장히 현실적인 사람이에요.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딱 그대로 보여준 철학자다 싶어요. 세상은 정말 이렇게 돌아가요. 밟지 않으면 밟히는 거예요. 밟히면 죽어요. 그러니까 밟아야 해요.   

  

(필로) 유모가 있냐고 조롱 섞인 말을 듣고서도요?   

  

(소피) 그건 기분 나빴지만, 트라시마코스의 이야기를 듣다가 생각나는 일이 있었거든요.  

   

오래전에 친정아버지가 사업을 하셨는데, 동업하던 사람이 있었어요. 큰 계약이 성사될 듯 말 듯한 상황에서 돈이 필요했어요. 현지에 공장을 지어야 했거든요. 동업자와 아버지는 사업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고 돈을 빌리기로 했죠. 일단 아버지 이름으로 돈을 빌리고 계약이 성사되면 빌린 돈을 같이 갚기로 했어요.     


그런데 해외로 출장을 갔던 동업자가 소식이 없는 거예요. 계약도 무산되고요. 아버지를 속이고 돈을 빼돌렸던 거죠. 그 이후에 아버지는 말도 못 하게 고생을 하셨지만, 사람이 사라지니 법이 소용없더군요.

     

10년이 지난 후에 아버지가 우연히 서울 한복판에서 그 사람을 발견하셨대요. 그런데 사기는 공소시효가 7년이라 만나서 따져봐야 마음만 다칠 것 같아서 모른 척하고 돌아섰다고 하시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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