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견과의 만남 그리고 이별
2003년의 어느 봄날, 이제 막 태어난 지 3개월 된 작은 시츄 한 마리가 아빠의 품에 안겨 우리 집에 왔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의 팔 한 뼘보다 작은 아기 강아지가, 행여 부서지기라도 할까 애지중지하며 온 가족이 강아지를 거실 한가운데 놓고 둘러앉았다.
"얘가 두 번째로 태어나서 두리래"
"하지만 두리 같지는 않은 걸?"
우리 집에 온 기념으로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다. 털이 몽실몽실해서 몽실이, 구름처럼 포근하니까 구름이... 그런데 웬일인지 털이 몽실몽실하고, 흰색 털과 고동색 털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시츄 강아지의 이름은 겉모습과는 영 딴판인 '제니'가 되었다. (당시 아빠가 미드 <프렌즈>의 주인공 제니퍼 에니스톤의 열렬한 팬이어서 그렇게 결정했다고 한다.) 훗날 엄마와 나는 이때 제니의 이름을 제니가 아닌 다른 것으로 지었어야 한다고 우스갯소리처럼 말하곤 했다. 어쩐지 새초롬한 이름 때문에 성격도 새초롬해졌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제니는 강아지 치고 참 애교가 없었다. 그게 제니의 매력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제니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참 미안한 순간이 많다. 맞벌이하는 부모님 그리고 학교와 학원을 전전하느라 바빴던 나로 인해 어린 강아지는 홀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애초에 강아지를 입양하기 적절한 환경이 아니었다. 그때는 나도 우리 가족도 무지했다. 강아지를 기르기 위한 적절한 환경, 보호자의 의무와 같은 기본적인 고민이 부족했으니까. 그런 우리라도 제니는 언제나 반겼다. 여느 강아지처럼 달려와 애교를 부리고, 손과 얼굴 이곳저곳을 핥는 식의 격한 애정 표현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만의 표현으로, 꼬리를 흔들고 괜스레 우리 주변을 맴돌며, 장난을 걸면서 부족한 보호자에게 넘치는 관심과 사랑을 주었다.
제니는 천천히 늙어가는 듯했다. 강아지의 나이로는 이미 중노년에 해당하는 7살 무렵에도 산책을 나가면 어린 강아지로 보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강아지가 몇 살이냐"는 행인의 물음에 "7살이에요"라고 답하면 화들짝 놀라는 상대의 반응에 은근히 뿌듯하곤 했다. 보호자의 서툰 관리에도 싱그러운 외모를 유지했으니 제니는 타고난 동안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인지 우리 가족은 제니의 노화나 죽음에 대해 더 일찍 생각해보지 못했다. 미리 알았더라면 더 많은 시간을 제니와 보내고, 더 꼼꼼하게 관리해줄 수 있었을 텐데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무한할 것이라는 생각에, 각자 살기 바빠서 제니와의 시간은 늘 뒷전이었다. 그게 지금도 참 미안하다.
영영 젊을 것만 같았던 제니도 10살 무렵이 되어가자 곳곳에 크고 작은 병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처음엔 피부병 같은 잔병치레나 발톱의 색이 변하거나, 털 색이 점차 연해지는 등의 자연스러운 노화 증상 위주였다. 그러던 것이 13살, 14살 병원에서도 소위 '노견'으로 분류되는 연령이 되자 자궁에 종양이 생기고, 눈에 녹내장이 생기는 등의 큰 병으로 이어졌다. 자궁 속 종양은 한 차례의 큰 수술로 제거를 했고, 녹내장은 이때부터 안약을 통해 관리하기 시작했다. 점점 병원을 찾는 일이 잦아졌고, 복용하는 약도 늘어갔다. 병원을 다닌다고 낫는 것 같지도 않았다. 되려 병을 진단받는 순간부터 제니는 더 빠르게 늙어갔다.
강아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제니의 경우엔 16살을 기점으로 더 급격하게 건강이 나빠졌다. 회복력도 더뎌졌고, 이때부터는 가지고 있던 병이 악화되거나, 새로운 병을 얻게 되어도 제대로 된 치료가 불가능했다. 노견이기에 '전신 마취'등에 위험이 따랐기 때문이다. 병원에서의 처방 대부분이 치료의 영역에서 관리 또는 현상 유지의 영역으로 바뀌었다. 체력도 눈에 띄게 떨어졌다. 잠을 자는 시간이 늘어났고 좋아하던 산책을 나가도 조금 걷다 이내 안아달라 떼를 썼다. 그때는 그것대로 참 마음이 아팠는데 제니의 마지막 두 해를 겪고 나니 그 조차도 그리운 시간들이다.
제니가 떠나기 마지막 두 해, 그러니까 18-19살의 시기는 사람으로 치면 중환자의 시기였다. 한쪽 눈이 멀기 시작해 점차 두 눈의 시력을 모두 잃었고, 디스크와 관절염으로 걷는 것을 힘들어하다가 결국은 뒷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다. 각종 통증약과 신장약, 염증약... 약이란 약은 달고 살았고, 떠나기 아주 직전엔 음식물 섭취와 배변도 홀로 하지 못했다. 지인들은 아픈 제니의 모습을 보는 것을 힘들어했지만, 그럼에도 나와 우리 가족에게 제니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아기'였다. 우리는 제니를 쓰다듬고 품에 안으며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제니를 돌보고 사랑을 주었다. '더 일찍 이렇게 돌보아주었더라면...' 미안함과 후회가 찾아왔지만, 그런 죄책감을 덜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제니는 기적처럼 "이 계절을 넘기기 힘들 것 같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도 보란 듯 약 1년 반을 더 살다가 마침내 우리 곁을 떠났다.
사실 아직도 제니가 떠난 것이 실감 나지 않는다. 엄마와 나는 종종 습관처럼 제니를 부른다. 되돌아오는 답이 없을 것이란 걸 알면서도 아직 우리 집 어디엔가 제니가 있을 것만 같아서. 제니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러본다. 집안 곳곳엔 엄마가 '꼭 제니를 닮아서 샀다'는 인형과 장식품도 한 무더기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19년을 함께 한 떠나간 가족을 추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