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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ture film Nov 28. 2020

<어느 가족>(2018)

[영화적 순간 002]

<어느 가족>(고레에다 히로카즈, 2018)



노부요(안도 사쿠라)는 쇼타(죠 카이리)와 류리(사사키 미유)가 뭐라고 불렀냐는 질문에 침묵한다. 힘겹게 입을 연 노부요는 “글쎄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되묻는다. “뭐라고 불렀을까요?” 1분 50초 동안 지속되는 이 쇼트는 '움직이는 프리즈 프레임'이다. 움직이지만, 정지되어 있다는 이 모순적인 말이 이 쇼트를 그리고 이 영화를 존재하게 한다.   

   

프리즈 프레임은 정지된 한 장의 이미지가 아니다. 그 이미지에는 이전 시간이 농밀하게 쌓여 있다. 그러기에 정지된 그 순간에 관객은 이미지의 가시적인 표면이 아니라 이미지의 비가시적인 결을 읽어내야 한다. 노부요는 기억이 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을 부르는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지 않았기에 침묵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두 아이와 자신의 관계가 아니라, 아이들이 생각하는 자신과의 관계를 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노부요는 머뭇거리면서 눈을 감고, 정면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연신 손으로 닦아낸다. 이때 노부요의 시간은 쇼타와 류리와 함께 했던 모든 순간으로 향한다. 즉, 불완전한 가족이 완전한 가족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순간으로 향한다. <어느 가족>은 이 쇼트를 통해 굳건한 믿음에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완전하다고 여겨지던 가족의 완벽한 균열이자 붕괴이다.      


완벽한 가족의 기대는 노부요만의 것이 아니다. 관객 역시 <어느 가족>의 서사 속에서 노부와 마찬가지로 완벽한 가족의 탄생을 기대했다. 그러나 관객에게 제시된 것은 정면을 향해 가족의 균열이자 붕괴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노부요의 '움직이는 프리즈 프레임'이다. 서사의 진행이 멈춘 순간, 관객은 <어느 가족>이 쌓아온 가족 이야기를, 자신이 믿었던 가족 이야기를 다시 생각한다. 즉, 이 쇼트는 <어느 가족>을 보며 구축한 자신의 믿음을 찌른다. 


(2020.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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