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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ture film Nov 29. 2020

<미쓰 홍당무>

멈추지 않는 미숙의 애씀 그리고 종희

미숙의 애씀, 미숙과 종희의 애씀


<미쓰 홍당무>(이경미, 2008)

★★★     


양미숙(공효진)의 첫 등장은 ‘애씀’이다. 졸업여행 사진 속 미숙은 다른 학생들의 평온함과 대조적으로 뛰어오르고 있다. 평온함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오직 ‘애씀’으로만 사진에 담길 수 있는 인물이 미숙이다. ‘단체’ 사진에 존재하기 위해 평온하면 되는 그들과 애써야 하는 나(미숙)는 이 영화가 설정한 주요한 이분법적 구조이다. 그러나 앞에 놓인 평온한 학생들은 미숙의 애씀에 관심이 없다. 사진 속에서 유일하게 애쓰는 미숙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담임선생 서종철(이종혁)이다. 그러나 상기해야 하는 지점은 종철이 평온한 그들의 무리에 있다는 사실이다. 즉, 종철은 평온함에서 애씀을 바라본다는 점이다. <미쓰 홍당무>의 서사는 종철의 이러한 태도에서 추동된다. 사진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미숙의 애씀은 종철에 대한 사랑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시퀀스는 10년 후 삽질하는 미숙이다.      


종철에 대한 미숙의 사랑은 오해/오인으로 가득한 삽질에 가깝다. 그러나 이 삽질만이 미숙을 존재하게 한다. 따라서 미숙은 삽질을 멈출 수 없다. 미숙의 삽질에 관심을 가지는 유일한 사람은 종희(서우)이다. 학생들은 미숙과 종희를 ‘전따’와 ‘전따 애인’으로 부른다. 명확하게 누가 전따인지는 알 수 없다. (미숙과 종희는 서로가 자신을 전따라고, 상대방을 전따 애인이라고 말한다.) 이 지점이 미숙의 애씀에 관심을 가진 서종철과 종희를 가르는 기준이다. 확실한 것은 미숙과 종희는 ‘그들’의 외부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유사점에도 미숙과 종희는 구분되어야 한다. 미숙의 삽질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면, 종희에게 삽질은 무엇인가?)     


영화는 외부에 놓인 그들이 서로 바라봄을 강조하며 끝이 난다. 오해/오인을 유발하는 종철의 모호한 바라봄이 아닌 서로의 마주 봄을 강조한다. 마치 함께이기에 삽질을 괜찮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마지막에 미숙과 종희는 피부과 의사 박찬욱을 찾는데 애쓴다. 그리고 미숙과 종희는 함께 그를 찾는다. 미숙은 박찬욱에게 고백한다. 또 다른 삽질의 시작이다. 다른 점은 종희가 함께 있다는 점이다. 박찬욱의 답변, 그리고 이후 미숙과 종희는 영화에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미숙의 고백에서 끝난다. 그러나 이 장면은 열려있지 않다. 오히려 닫혀 있다. 박찬욱은 미숙을 피해 도망갔다. 그러나 이 정보는 관객만 알고 있다. 미숙은 그리고 종희는 모른다. 이 정보는 제공되지 말았어야 했다. 관객에게 제공된 이 정보는 관객을 졸업여행 사진 속 평온한 ‘그들’ 속으로 밀어 넣는다. 영화는 관객을 ‘그들’ 속에 결박한다. 결국 <미쓰 홍당무>는 미숙과 종희의 마주 봄을 이야기하지만, 그곳에 관객의 자리는 두지 않았다.         


(2020.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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