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만나고, 질문하고, 다시 걷고
※ sututre film의 모든 글에는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내일을 위한 시간>은 침묵으로 시작한다. 카메라는 불규칙적으로 움직이지만, 산드라는 무척이나 피로한 듯 여전히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다. 모든 것이 무력해 보인다. 침묵에 균열을 내는 것은 전화벨소리이다. ‘힘겹게’ 일어난 산드라가 전화를 받는다. 곧이어 오븐에서 소리가 들린다. 산드라는 ‘힘겹게’ 주방으로 건너가 오븐에서 파이를 꺼내며 통화를 계속한다. 카메라는 여전히 산드라를 잡고 있지만, 잠들어 있을 때보다 심하게 흔들린다. 전화를 끊은 산드라는 “울면 안 돼”라는 다짐을 하며 빠르게 2층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항우울제 약을 먹는다. 힘겹게 움직였지만, 다시 무력함에 빠진다. 하지만 산드라는 말한다. “버텨, 울면 안 돼”
침묵에 세계에서 어떤 미동도 보이지 않던 산드라를 움직이게 한 것은 해고와 관련된 전화 한 통이었다. 산드라는 복직을 앞두고 있었다. 이것이 그가 힘겹게라도 움직여야 하는 이유였다. 문제는 이 해고 결정이 동료들의 투표 결과라는 점이다. 동료들은 산드라의 해고와 보너스 중에서 투표했다. 그러나 사장은 이 투표가 공정하지 않았다는 제보를 듣고 월요일 아침 재투표를 제안했다. 사실 이 해고는 동료들의 투표 결과가 아니다. 동료들은 분명 투표를 했지만, 이 투표를 제안한 것은 사장이다. 그러나 사장은 오히려 ‘공정’을 운운하며 이면으로 숨는다. 산드라가 설득을 위해 처음 찾아간 동료 윌리(알랑 엘로이)의 말처럼 동료들은 “널 반대한 게 아니라 보너스를 택한 것뿐”이다. 이 “양자택일을 강요한 건 사장”(필자강조)이다. 산드라는 말한다. “알아요. 강요한 건 비열한 짓이지요. 하지만 제 일을 잃고 싶지 않아요.”(필자강조)
무력함에 빠져 있던 산드라는 절실함에 의해 몸을 움직인다. 두 번의 낮과 한 번의 밤 동안 동료들을 만난다. ‘강요’에서 알 수 있듯 동료들에게 제시된 양자선택은 괴로움과 난처함을 수반한다. 나딘처럼 산드라와의 만남 자체를 거부하거나, 티무르처럼 괴로워하거나, 히샴처럼 난처해하거나, 미레유나 윌리처럼 사정상 어쩔 수 없음을 말한다. 동료들이 ‘우정’ 대신 돈을 택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즉 산드라는 철저한 고립감을 인지한다. 좌절할 때도 있지만, 산다르는 힘겹게 몸을 움직여 동료를 만난다. 산드라는 항상 피곤하며, 그때마다 항우울제를 먹고 잠을 잔다. 심지어 자살을 기도한다. 그럼에도 그는 또다시 걷는다. 그리고 동료들을 만난다. 동료들의 이야기를 듣고, 동료들의 삶을 본다. 어느 누구 하나 주말이라고 편하게 쉬는 사람이 없다. 불법이건 합법이건 그들은 또 다른 일을 한다. 산드라와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고립되어 있다. 이것이 그들이 ‘우정’ 대신 ‘돈’을 택한 이유이다. 속력을 요구하면서 그들을 고립된 존재로 만들고, 가만히 있으라 하면서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내일을 위한 시간>의 서사는 단순하다. 두 번의 낮과 한 번의 밤 동안 동료들을 만난다. 그러나 이는 바디우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사건이다. 바디우에게 사건이란 “상황․의견 및 제도화된 지식과는 ‘다른 것’을 도래시키는 것”이다. 고립된 현재의 상태는 어떠한 진리를 산출하지 못한다. 불안하듯 흔들리는 카메라의 리듬을 따라 산드라는 몸을 움직이고 동료를 만난다. ‘경쟁’을 최우선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체제는 ‘열심히’를 강조한다. 열심히만 하면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고, 모두에게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이는 “하루에 3분만 투자하면 인생이 바뀐다”는 자기계발서의 논리 그 자체이다. 최소한의 그것만 하면 인생이 바뀐다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것마저 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의 ‘거지 같은’ 상태라고 말한다. 결국 ‘상징질서’의 구조적인 문제와 대면하는 것을 차단하고, 철저하게 개인의 문제로 환원한다. 이는 불안감 앞에서 할 수 있는 본능과도 같은 연대를 불가능하게 한다. 산드라는 동료들을 만나면서 멈춰버린 진리 산출 공정을 가동한다.
일자리에 대한 절박함으로 동료들을 찾은 산드라는 그들의 처지와 대면하면서 그들의 왜 고립되어 ‘돈’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깨닫는다. 같은 질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마주한 다양한 차이. 그곳에는 동료들의 어찌할 수 없음의 외로움/고립이 있다. 산드라와 동료들은 스스로 피로해지는지도 모르고 고립을 선택했다. 이는 그릇된 가치관 때문도, 열심히 살지 않았기 때문도, 실수를 했기 때문도 아니다. 교묘하게 비가시적으로 강요하고 통제하는 “가만히 있어라”, “세상이 속력을 요구한다” 등에 순응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고립을 어떻게 할 것인가? 불안하고 힘들기에 고립을 잊을 것인가? 아니면 고립을 잊지 않을 것인가? 고립을 잊지 않는다면, 더 심한 고립으로 들어갈 것이며, 고립을 잊는다는 것 역시 실현 불가능한 환상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필요한 것은 고립들과 또 다른 고립들의 교감’이 아닐까? 그들의 난처함, 괴로움, 특히 안느(크리스텔 코닐)의 감정 변화를 목격하면서 산드라는 이제 울기보다는 웃는다. 거지처럼 동정을 구해야 한다는 자괴감을 느끼던 산드라는 더 이상 자신을 거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희생자라던 생각에서 모두가 희생자라는 자각으로의 변모이다. 흔들리는 카메라는 여전하지만, 버티기 위해 겨우 움직였던 그의 움직임이 스스로 뻗어나간다.
투표 결과 산드라는 해고다. 두 번의 낮과 한 번의 밤 동안 쉬지 않고 걸으며 만났으나, 해고다. 그러나 산드라는 더 이상 피곤하다고 잠을 자지 않는다. 산드라는 더 이상 항우울제를 먹지 않는다. 산드라는 더 이상 울지 않는다. 산드라는 더 이상 좌절하지 않는다. 산드라를 만난 안느가 자신을 위해 처음으로 뭔가를 결심했듯이 산드라도 동료를 만나면서 변했다. 어떤 정치적 연대의 구호보다도 강력한 감각적 연대이다.
사장은 또 다른 제안을 한다. 산드라를 복직시켜주는 대신 재계약 대상자 중 한 명과는 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 산드라의 복직과 보너스 중 선택하라고 투표를 제안한 것은 사장이다. 그렇다고 이 구조의 최종심급이 사장은 아니다. 사장은 “아시아와의 가격경쟁”을 언급한다. 결국 최종심급은 표상되지 않는다. 이들은 형태를 교묘하게 바꿔가며 자신을 비가시적 세계에 안착시킨다.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다는 사실. “영원한 현재”라는 고통스러운 현실이 우리가 놓여 있는 가혹한 실재이다. 사장은 산드라에게 너무나 달콤한 선택지를 제안한다. 사장의 해고 지시를 동료의 선택에 의한 해고처럼 만들었듯이 사장은 산드라와 동료들에게 다시 고립되라고 말한다. 산드라는 이 기만적인 제안에 “남을 해고시키고 복직할 수 없어요”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여보, 우리 잘 싸웠지? 나 행복해” 산드라에게 만남은 ‘투쟁’이었다. 걷고, 만나고, 질문하고, 돌아서고, 걷고. 만나고, 질문하고……. 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산드라는 점차 항우울제를 찾지 않게 되었다. 대신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낙관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다. 침묵으로 시작했던 영화는 소음으로 끝난다. 회사를 나온 산드라는 다시 걷는다. 카메라는 여전히 흔들린다. 그녀의 발소리가 들리고, 그녀가 사라지고, 발소리가 사라진다. 그러나 산드라를 둘러싸고 있던 소리들은 여전히 들린다. 다시 일자리를 알아본다고 하지만, 이 문제는 다른 일자리를 구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듯, 이 회사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시간이 지속된다. 산드라의 동료들은 이후 또 다른 산드라가 될 공산이 크다. 일자리를 옮겨도 산드라 역시 또 다른 산드라가 될 가능성이 크다. 어설픈 ‘희망’으로 포장하지 않고 냉혹한 질문 그 자체를 던진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한 가지 법칙이 세상을 지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