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을 간다고 가족들한테, 친구들한테, 같이 일했던 사람들한테, 배낭을 사러 가서 만난 사장님한테, 신발 사러 가서 만난 매장 직원한테, 피아노 선생님한테, 요가 선생님한테, 복싱 사범님한테, 계속해서 말을 하고 있다. 가장 많이 나오는 반응은 '부럽다' 일상에서 벗어나 한 달을 떠나있다는 것 자체가 부러운 것 같다. 그런데 내 생각보다 '왜 가?'라는 질문은 잘 안 나오는데... 나 뭐라고 대답할지 준비했단 말이야... 얼른 물어봐 줘... 그냥 내가 물어본다. 이건 혹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필요한 사람을 위한 글이다.
"순례길 왜 가?"
순례길을 왜 가는지는 충분히 궁금할 만하다. 첫 번째, 기간이 만만치 않다. 약 한 달이라고 하지만 최소 35일을 잡아야 한다.(순례길 프랑스길 기준) 35일 동안 일상을 지탱해 온 모든 것을 그만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무노동 무수입이 원칙인 노동자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35일을 쉰다는 것은 돌아와서도 일이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는 생존의 두려움을 꿋꿋하게 이겨내야 하기 때문이다. 주말은커녕 일주일도 휴가를 내기 힘든 직장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건 '프리랜서'라는 내 직업의 특수성 때문에 가능한 것처럼 보여서 더더욱 그렇다. 심지어, "일한 지 올해로 딱 10년 됐거든요."라는 내 말에도 다들 갸우뚱한다. '어쩌라고? 나도 그래.'라는 눈빛이다. 아니... 나는... 주말도 없고요... 휴가도 없고요... 진짜로 안 쉬고 일한 지 10년 된 건데요... 라는 말은 덧붙이지 않는다. 각자 자신이 짊어진 짐이 가장 무거운 법이다.
두 번째, 비용이 만만치 않다. 한국을 떠나는 비행기, 돌아오는 비행기만 해도 약 150~200만 원 정도. 원래 등산을 하던 사람이 아니라면 배낭, 등산 스틱, 트레킹화, 샌들만 사도 50만 원은 가볍게 넘는다. 그리고 내가 지금 또 추가로 산 것들이 뭐냐 하면... 침낭, 발가락 양말(인진지라고 강력 추천받은 양말), 울양말(배낭 상점 사장님이 없으면 안 된다고 했다), 스포츠 타월(빨리 마르는 초경량, 30g인데 진짜 비쌈), 무릎 보호대와 발목 보호대(마라톤을 뛸 때도 필요 없었는데...), 챙모자(햇빛 알레르기가 있기 때문에), 이러면 또 20만 원은 우습게 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정도 금액이라면 여행 일정을 더 길게 잡거나, 다른 나라나 도시 한 곳을 더 여행할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다. 이제 누가 순례길을 간다면 '시간을 뺄 수 있다'는 것보다 '그만큼 돈이 있다'는 것에 더 놀랄지도...
세 번째, 고생길이다. 작년에 일주일 동안 발리 여행을 갔었다. 개인적으로 휴양지 여행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편인데도, '천국이라는 곳이 있다면 이렇게 생겼겠구나.' 했다. 왜 영화나 드라마에서 천국을 표현할 때 늘 바다로 표현하는지 이해가 되었던 여행.
지금도 2025년의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발리 여행만 해도 그렇다. 같은 돈이면, 같은 기간이면, 휴양지를 가서 맛있는 음식도 먹고 힐링도 하는 것이 일상에서 벗어나는 목적이어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하루에 약 25km씩 걷고, 옷도 두세 가지만 돌려 입어야 하고, 발에 물집이 잡히고 심하면 발톱까지 빠진다는 악명 높은 순례길을 가는 것일까? (이런데도 사람들이 나에게 순례길을 왜 가냐고 묻지 않는지 아직도 모르겠음)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데 내가 아직 젊어서일까? 아무튼 세계인이 인정하는 고생길이기 때문에 더더욱 '왜 걷는지' 궁금할 만하다.
이렇게 크게 세 가지만 해도 '순례길을 가는 것'에는 마땅한 이유가 필요하다는 데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한 마디로 모든 궁금증을 해소하는 듯했다. "'버킷리스트'라서요." 한 사람한테는 이렇게까지도 말했던 것 같다. "당장 내일 죽어도 아쉬울 게 없이 산 것 같은데요. 진짜 당장 내일 죽는다면... 순례길 못 다녀온 건 아쉬울 것 같아서요." 이 말은 순례길 다녀와서 죽는다는 소리가 아니다. 그냥 가고 싶은 거다. 묵묵히 걷고 싶은 거다. 무엇인가를 잔뜩 이고 지고 걷는 것은 인생과 닮았잖아? 그런데 거기에 더해서 왜 가냐고 묻는 사람은 없어서... 아쉬운 내가 이제부터, 순례길을 가는 이유에 대해 몇 가지 예시를 줄 테니, 왜 가냐는 질문을 받는 분들이라면 마음껏 써먹으시길.
일단 가장 쉬운 건 역시, '버킷리스트여서요.'다. 가고 싶어서 간다는 거다. 생각보다 이 대답으로 많은 궁금증이 정리된다.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가끔은 '너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라는 눈빛을 받을 때도 있다. 또, 나라는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이 몸으로 짊어지고 걸어가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 그리고 나면 내가 가진 것들을 다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살아가기 위해 우리에게는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몸소 느껴보고 싶다. 더 좋은 식탁, 더 좋은 TV, 더 좋은 자동차, 더 좋은 가방보다 중요한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만으로 품어온 질문을 몸으로 경험해 보기. 또, 신체적으로 극한의 한계를 마주해 보는 것도 하나의 이유다. 21세기를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체력적으로 극한의 한계'에 다다르는 경험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더더욱 경험해 보고 싶다. 체력적으로 극한의 상황에 내몰렸을 때 나는 어떤 선택을,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인지를 알게 되면 남은 인생을 함께 살아야 할 나를 좀 더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것보다 사실 이유가 더 많은데요. 누군가 집요하게 물어봐 준다면 말을 하면서 더 생각이 풀려나가겠지요.
아. 더 이상 무언가를 구매하는 내용의 글은 적지 않을 예정이다. 앞으로는 '순례길 대비 훈련기', '순례길 짐싸기', '순례길 일기'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