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많은 사람을 울렸던 진모영 감독의 노부부의 사랑과 이별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제목이 문득 떠오른 날이었다.
“아버님, 오늘 조영실 가셔서 심장검사만 하고 병동 가실 거예요~ 아시죠?”
매우 중증도가 높았던 할아버지 환자분이 기도삽관도 빼고 코로 산소를 소량 드리면서 투석도 더 이상 필요가 없어져 병동 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화도 잘 되시던 할아버지는 80대로 연세가 많으셨다. 다른 부분들이 다 호전이 되니 심전도 검사에서 이상 소견이 조금 보이는 부분이 마음에 걸렸는지 주치의는 심장혈관 검사만 갔다가 하루 경과 보고 내일 병동을 가자고 하였다. 심장검사이니 보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별 일이 있을까 했는데, 그날 따라 분주하고 상태가 좋지 않은 환자들과 입퇴실 환자들이 많아 정신없고 분주한 병동이 나의 어딘가 모르게 불안한 심리를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창밖에는 유난히 많이 내리는 비가 창문을 후드득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머릿속으로 '낮인데 뭔가 밖이 어둡네'라는 생각이 자각을 못할 만큼 스치듯 지나갔다.
환자가 나이가 많았던 만큼, 보호자도 배우자인 할머니뿐이었다. 자식들과 손자들은 너무 바쁘게 타지 생활을 하고 있는지 병원에 당장 올 수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핸드폰도 없는 배우자인 할머니를 주변 지인을 연결하여 가까스로 연락하여 오게 하는 것만으로 얼마나 시골에서 어렵게 살고 계시는지 짐작이 가게 하였다.
"환자분~ 심장 혈관 검사 간단히만 하고 오실게요. 간단한 시술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시고, 배우자분 오시면 같이 일반병실 올라가요~"
할아버지는 나의 설명에 말없는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하며 중환자실을 나섰다.
평소보다 시술이 오래 걸리네 생각하던 찰나 주치의가 시술방으로 갑자기 달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조용한 요란함에 나의 심장이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띵띵띵띵...!!
몇 시간이나 한참 지난 뒤에야 요란한 모니터 알람음 뒤로 침대에 창백한 얼굴로 돌아오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왼쪽 사타구니 시술한 부위로 출혈이 멈추지 않았고, 출혈로 인해 낮은 혈압을 경고하듯 알람은 시끄럽게 중환자실을 울렸다. 알람을 대변하듯 할아버지는 이전과 다르게 불안정한 모습이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치며 팔다리를 버둥거리는 할아버지가 혹여 침대에서 떨어질까 걱정도 되면서 움직임으로 인해 혈관이 지혈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기에 여러 번 말렸지만 이미 나의 목소리는 이미 너무 불안정한 할아버지에게 닿지 못하는 상태였던 것 같다.
"환자분!!!! 다리 가만히 계세요. 아니면 지혈이 안 돼서 정말 큰일 나요!!"
"악악악!! 나 죽는다~!!!!"
큰 소리로 말려도 할아버지는 버둥거리면서 출혈은 더 심해졌고, 수혈을 있는 대로 하며 의사들은 수술실에서 파견까지 나와 혈관을 직접 꿰매며 출혈을 막았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몸부림에 이런 대처 또한 물거품이 되면서 침대는 금방 붉게 물들어갔다.
"할아버지!! 이러다 진짜 죽어요! 진정하고 다리 가만히 계세요~!!"
"..."
나의 이 말을 끝으로 할아버지는 의식 저하와 함께 말이 없어졌고 심폐소생술이 시작되었다. 1시간 이상을 마음속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며 땀방울에 적셔진 기도를 하였지만 할아버지는 이미 먼 강을 건너버린 것 같았다...
"보호자는 어디까지 왔나요?"
정신없이 몇 시간을 사투하다가 문득 주치의의 질문에 순간 창밖으로 시선이 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구름 뒤에서 힘겹게 빛을 내고 있던 해는 완전히 져가면서 노을만이 불그스름하게 창문을 통해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보호자인 할머니가 출발한다고 한지 8시간도 더 지난 때였다. 이쯤이면 도착했지 않을까 생각하며 중환자실 문을 열고 나간 순간 보자기 짐보따리와 지팡이를 땅바닥에 두고 문 바로 앞에서 주저앉아 기다리고 있는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어머님..."
자신의 몸조자 가누지 못해 힘들어 땅바닥에 주저앉아 할아버지와 함께 병실 갈 생각을 하며 몇 시간이나 기다리고 있었을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순간 눈물과 함께 나도 모르게 어머님..라는 말이 입에서 새어 나왔다..
보자기로 열심히 싼 짐과 지팡이를 대신 들어드리고, 할머니를 부축하며 할아버지 곁으로 모시고 들어갔다. 일반병실에 가서 함께 웃으며 대화하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는데...
할머니가 마주한 것은 이미 혈색이 사라져 창백해지고 차가워진 말 없는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보자마자 연신 머리를 쓰다듬으며 늦어서 미안하다며 희미하지만 사랑스러운 미소로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마치 오랜만에 단짝 친구를 만나 좋은 듯이 시골에 버스가 안 와서 한참을 기다리고, 오는 길에 다리가 말을 안 들어서 6시간 넘게 걸려 이제 왔다며 할아버지 볼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
할머니의 진심 어린 말에 할아버지는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
할머니의 마음은 어떻게 조금이라도 지켜드릴 수 있을까.
애초에 지켜드릴 수 있는 상황일까..
담당 주치의는 조용히 할머니를 불러 상황을 설명했고, 그 순간 할머니의 시간은 멈춘 듯했다.
"일반병실 간다고 듣고 왔는데... 의사 선생님들이 알아서 잘 봐줬겠지요... 지가 뭘 알겠습니까.. 할아버지가 잘 견뎠어야 했는데... 이제 그럼.. 어떻게..."
시골에서 할아버지와 두 분이 함께 순박하게 살아온 삶을 대변하듯 할머니는 그저 할아버지만을 지긋이 바라보고 손을 꼭 잡으며 눈망울은 촉촉해져 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행복하게 함께 웃으며 지냈을 시간들이 눈앞에 선명히 그려졌다. 나는 슬픔과 안타까움과 허탈함... 그리고 무색하게 흘러간 시간을 원망하는 마음이 뒤섞여 어떠한 말도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할머니를 꼭 안아주는 것 밖에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할머니는 다시 할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전했다.
"할아버지요. 먼저 가거든 좋은 곳에 자리 잡아두고 얼른 나를 데리러 와요. 나만 홀로 오래 남겨두지 말고.. 우리 거기서 같이 삽시다"
할머니는 주저앉아하염없이 오열하였다.
바쁘고 정신없는 중환자실 한 켠에는 그렇게 잠시 시간이 멈추어 있는 공간이 존재했다.
예측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이별을 겪은 할머니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더 위로해 드릴 수 있었을까. 할아버지가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내가 했던 말이 마지막이 될 줄 몰랐기에... 화살처럼 내 마음에 깊이 박혀 나 스스로는 죄책감에 공기가 무거워 숨쉬기가 버겁게 느껴졌다.
눈물 자국 가득한 빈자리를 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든다.
유난히 서늘하게 느껴지는 날. 창밖의 비는 그쳐가고 있었지만, 내 눈에 비친 창틀은 계속 흔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