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화 <20세기 소년> <21세기 소년> 및 영화 <20세기 소년> 트릴로지의 스포일러가 포함된 리뷰입니다. 또한 읽거나, 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충분한 설명도 되어 있지 않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7ewHHiQoHfs
<20세기 소년> <21세기 소년>을 다 읽는지는 조금 되었다. 수년 전 일이다. 영화화된 작품을 본 지도 꽤 되었다. 그러다 최근 XSFM 의 <그것이 알기 싫다> 233a 233b 234a 234b 회에서 '옴진리교와 일본 사회에 대한 기묘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시 찾아 읽고, 보았다. 그리고 최근 완결된 우라사와 나오키의 <빌리 배트> 리뷰를 쓰려고 했던 계획을 뒤로 좀 미루게 되었다.
지금보다는 훨씬 어렸을 수년 전, 나는 이 작품의 큰 시작에 비해서 끝이 항상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정리되지 않은 느낌. 영화 버전을 보고 나서는 기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영화 자체는 분명 부족한 부분이 많았지만, 마지막 엔딩에서 만큼은 확실히 '결말'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위에 언급한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되어서 리뷰를 쓰기 시작했다. 언급한 팟캐스트에서는 '옴진리교 사건'에 대한 묘사와 일본 사회의 반응이 다뤄진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공중부양'을 매개로 급성장한 신흥종교라는 내용이 <20세기 소년>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 내용을 조금 다르게 생각할 수 있겠단 느낌을 받았다.
작중에서 '친구'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선과 악의 이분법 세계관을 가진 아이들의 놀이 속에서 탄생한다. 그리고 그 놀이는 켄지 일당의 기억 속에서는 아름답게 그려진다. 그러나, 작품이 진행될수록 그 놀이에 배제된 아이들이 그려진다. 처음 <20세기 소년>을 접했을 때 - 아마도 중학생 아니면 고등학생 때였으리라 - 그 아이들이 천성이 나쁜 것처럼 읽혔다. 작가의 전작 중 <몬스터>의 요한을 떠올리며 '친구'의 캐릭터를 잡아갔었다. 그러나 작품에서 '친구'는 가면 갈수록 '순수한 악' 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졌고,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에는 그게 불편했었다.
결말 부분으로 달려갈수록, '친구'를 만든 것은 결국 켄지, 그리고 그 친구들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물론, 단순히 그런 행위를 했다고 세계 정복을 하는 괴물이 만들어지진 않으니 모든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켄지는 친구 - 가츠마타에게 사과한다. 만화책으로는 서너 번째, 영화로는 두 번째 보면서 이 부분을 조금 더 집중해서 보게 되었다. 저 불필요해 보이는 장면은 뭐지. 사건은 끝났는데, 가츠마타는 죽었는데 하던. 그리고 만박회장에서 '밥 레논'을 부르지 않는 모습에 약간 의아해했었다.
'친구' 그리고 <20세기 소년>이라는 작품에 핵심적인 소재 중에 하나는 '익명성'이다. 이 익명성 때문에 켄지는 처음 다른 친구들을 의심하기도 한다. 가츠마타의 진짜 얼굴은 작품 끝까지 제대로 조명되지 않고, '친구'는 항상 붕대를 감고 있거나, 가면을 쓰고 있다. 이 익명성은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작품에 대한 다른 해설들을 보면 - 켄지의 우주 방위대 배지 절도 사건 이후, 가츠마타는 후쿠베 등에게 '절교'를 당해 '없는 사람' 취급을 받은 것으로 나온다. 후쿠베 역시 친구들의 기억에서 잊히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들만 잊혔던 것일까. '친구' 주변에 모인 사람들의 다수는 그 '잊힘'을 매개로 모여 있다. 전설의 형사에게 미치지 못해서 잊혀갈까 두려워하는 인물. 프로모터로써 잊혀가는 만죠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청년들. '친구교'는 그렇게 '켄지' 가, '사회'가 잊은, 잊으려고 하는, 잊어버린 것들을 끌어 모은다.
그렇기에 20세기의 기억에 천착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란 생각도 든다. '친구'가 원하는 것은 켄지가 쓴 '예언의 서' 속의 미래가 아닌 1970년대의 어린 시절이다. 그렇기에 그 시절의 것들이 집착한다. 만국박람회도 마찬가지. 미래적으로 만들어낸 '우주 방위대' 라거나 '레이저총' 같은 것들도 사실 미래에 대한 바람이 아닌 과거에 '기억'에 의존한 것으로 전혀 진보적이지 않다. 과거의 상상을 재현하는데 그칠 뿐.
하지만 놀이라는 것은 배경보다도, 규칙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어야 진행될 수 있다. '상대방'. 어떤 의미에서의 복수극일까. 후쿠베가, 가츠마타가 '켄지'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하기만 했다면, 이렇게 세상을 정복하려는 행위 자체는 의미가 없다. 그러니 '신령'님이 말했듯, 이것은 놀이고 놀이가 싫증 나면 끝내야 한다. 잊혀버린 소년은 21세기로 나갈 수 없다. 20세기 그대로 끝을 내야만 한다. 그러니 중학교 시절 들었던 노래 그대로, 친구는 '20세기 소년'이며, 21세기에도 20세기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내고, 그리고 끝을 내려고 하는 것이다.
때문에 '새로운 희망'인 '칸나'는 극 중에서 '결정적인 활약'을 할 수가 없다. 그는 '희망' 일 뿐. 이 이야기는 '20세기 소년'의 이야기다. '엔도 켄지'와 '가츠마타' 시작도 끝도 모두, 그들의 것이어야 한다. 지금 세상의 문제를 후대에게 맡기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문제를 가장 잘 알고, 이해하는 당사자의 움직임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켄지는 마지막까지, 사과하기 위해 노력하고 - 그리고 '밥 레논'을 콘서트장에서 부르지 못한다. 그리고, 그 노래를 '너희들이 불러' 라며 '에로임 에 사임즈' 등에게 떠넘긴다.
나는 일본 사회를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20세기 소년>의 이야기를 보면서 일본, 그리고 이어서 한국 사회를 떠올리게 되었다. 마침, 처음 언급한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에서 일본의 '유토리 세대'를 두고 교육을 통한 사회변화를 원하는 어른들과 - 구세대 사람들이 신세대(유토리 세대)에게 불만을 내뿜는 다는 내용을 들으며 이 작품과 연결 지어 생각하게 되었다.
일본의 지금 세대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버블경제의 붕괴. 치열한 경쟁과, 그로 인한 학교폭력 등 문제. 그리고 신흥종교 집단의 테러와 그 기억들. <GTO> 등의 작품에 내가 공감했던 것을 보면 한국 사회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많은 부분을 일본을 모방했으니 자연스럽기도 하겠다. 이제, 새로운 세대(21세기 소년)에게는 20세기 소년이 만들어놓은 영광과, 그리고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있다. 20세기 소년은 21세기 소년에게 왜, 우리 때처럼 하지 못하냐 말한다. 우리가 이렇게 많이 이루어두었는데도, 너네는 왜 더 못하냐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21세기 소년이 물려받은 유산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도 함께 섞여 있다. 이것을 치우지 않고서는 같은 상황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그러니 20세기 소년의 놀이판을 접어야만 한다. 그 놀이판에 배제된 사람들, 피해자에게 사과해야만 한다.
그러니 작품은 어떻게든 켄지가 가츠마타에게 사과를 해야만 끝나는 것이다. 구세대의 잘못에 대해서는 구세대가 사과해야 한다. 해결은 -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의 당사자가 사과하지 않고서는 끝날 수가 없다. 나에겐 그런 것이 있을까. 우리에게는, 우리 사회에게는 무엇이 있을까.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작품 에필로그에 엔도 칸나와 쵸 형사가 엔도 키리코를 찾아간 마을에서 우물을 파는 것처럼.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을 하는 것. 수십 년을 돌아 그때 이랬어야 하는데 하는 일을 만들지 않는 것. 때문에 '친구'가 착하다 나쁘다 하는 말은 의미가 없다. 이 놀이에서 우리는 편을 가르는 것이 아닌 다른 룰을 찾아야 한다. 단죄의 대상을 만들기는 쉽다. 특정 인물, 단체나 사상을 악으로 규정하는 것은 보기보다 쉽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으니까.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하는 일을 할 뿐이지 않을까.
(<빌리 배트> 리뷰에서 이어질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