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을 처음 생각해보다.
어딘가에 빨간 알약이 있고 그 알약을 가진 모피어스와 조우할 날이 있지 않을까, 그런 날이 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생각하게 하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저자의 서문에 있는 글이다. 저자의 의도가 충분히 전해졌다. 평소 생각하고 있던 의문점들이 조금은 해소되기도 하였지만, 그 보다는 이 지점에 책의 의의가 있었다. 판결은 선택이다. 어떤 선택을, 왜, 어떤 방식으로 했는지에 대한 은퇴한 대법관의 소회는 진정 빨간약과 같았다.
가끔 왜 저런 판결이 나오는가 하는 사건들이 있다. 멀리 떨어져서 짧은 기사 만으로 판단하던 것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했지만 깊게 보지는 않았다. 법은 어쨌든 내게는 너무 어려운 것들이니까. 업무와 관련된 법률만 보다가 지쳐 떨어지기 일수인데,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최근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재판이 열리고 난 후, 기사들을 통해 그 결정이 헌재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 맞는가 하는 의문이 나왔었고, 나도 그 의문을 여태 가지고 있었다.
법에 대한 해석의 사실상 최종적인 권한을 사법부가 가져가는 것. 그리고 그 사법부는 과연 민의를 대변하는 것일까? 그들이 가장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찾는 과정만 치르는 것일까. 책을 보면 판결은 어쨌든 '사회적 통념'에 영향을 받는 것 같아 보인다. 현시대의 위선은 다음 시대의 교양이 된다는 인상 깊은 말을 들은 얼마 전의 독서토론이 떠오르기도 한다.
어쨌든 개안은 하였고, 이 세계를 받아들일 것인지는 내 마음에 달린 문제인 것 같다. 일단 난 네오는 아닌 것 같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큰 변화 없이 새로운 고통 - 고민을 떠 앉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긴 한다.
토론 과정을 다수의견, 소수의견, 별개의견, 보충의견 등에 고스란히 담는다. 어떤 논리로 다수의견의 결론이 내려지게 되었는지를 드러냄으로써 대법원 판결이 순전히 개인의 주관적 입장이 아닌, 공동체에 내재한 원칙들을 찾는 과정을 거쳤음을 밝히는 것
기록에 관한 서울대 모 교수님의 글이 생각난다. 한국의 자랑스러운 유산 중 하나인 조선왕조실록. 그 편찬 과정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가능한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하는 과정이 참 눈물겨울 정도이다. 이 내용들을 보면서, 판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지인과의 관계까지 끊는다는 표현을 읽으니 새삼 그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그 정당성 여부를 떠나서 제도적으로 꽤나, 대법원의 판결은 꽤나 합당해 보이는 과정을 통해서,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놓칠 수도 있는 부분까지 담아내려 노력하는 것 같아 보인다. 이런 이들을 일종의 간선제의 형태를 빌어서 우리가 임명하고 있다고 보니, 이게 맞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하는 전문가들을 과연 대중의 선택에 맞추어 뽑을 수 있느냐 물어보면 그건 또 아니기도 하니까.
어쨌든, 저자의 주장을 따르면 '공동체에 내재한 원칙' 들이 우리의 법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의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 것 같고, 그 방향을 찾는 것은 사법부 행정부 입법부가 나눠 가지고 있는 듯하다. 입법부는 주기적으로 그 직무의 수행 여부를 심판하고 있고, 어쨌든 국회의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기록도 꼼꼼히 이뤄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행정부의 경우에는 그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꽤나 미지의 영역에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특히 청와대나 국정원 같은 곳의 기밀 정보에 대해서 - 일반 국민에게 알리면 안 되는 것이 좋다는 판단은 당연히 있지만 -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도 들었었다.
판사들은 자신을 뽑아준 선거구민들을 의식하는 의원들과는 달리 소수자의 기본권을 선언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할 수 있다
재미있는 지점이었다. 지금의 선거 제도를 통해서 누락될 수 있는 소수자를 지킬 수 있는 제도적 안정장치로 기능할 수 있는 '가능성' 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실제로 기능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글쎄 라는 생각이 절로 들지만.
그는 “헌법의 미학은 발전하고 진화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위 문장이 함께 떠오른다. '공동체에 내재한 원칙' 외에, 가장 판결의 가능성의 방향을 분명하게 지시할 수 있는 것은 - 또한 도덕적인 권위가 아닌 법적으로도 권위를 지닐 수 있는 '헌법'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헌법은 가치를 담고 있다. 전문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알고 있는 조문들을 보면 모호하기 짝이 없는 표현들로 이게 '법'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하지만 그것은 규제하기 위한 '법' 이라기보다는 그 법들의 한계와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원재료들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참 맞는 말이 적혀 있구나 생각하게 된다. 유시민 작가가 좋아했던 6 공화국 헌법의 '행복추구권' 같은 가치들을 생각해보면 말이다.
그러니 이번 헌법 개정에 대한 정치적 논의가 정치적인 도구로만 활용되고 있어 보이는 현실이 살짝 안타깝다. 물론, 선거 제도에 대한 부분은 많이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맞지만 - 우리가 앞으로 지향해야 할 바에 대해서 더 논의할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솔로몬의 판결과 황희의 이야기가 함께 떠올랐다. 솔로몬의 판결은 아이의 어미라 주장하는 두 사람에게 아이를 갈르라는 식의 판결을 내려서 그 진위를 확인했다는 옛이야기에서 기원했다. 그 이름을 딴 방송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었었다. 그 프로그램은 법에 대해서 변호사들이 나와서 명징한 해석을(비교적) 내리는 것으로 인기를 끌었다.
한국 사람들은 무언가 막혔을 때에 '법대로 해'라는 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사소한 시비에 있어서도 국가권력의 권위를 통해 판결을 내리는 것이 그 끝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 권위의 최상위에 있는 사람들은 되려 우리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두루 살펴서 결정을 내리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그 우리란, 일단 이 나라의 법 기준으로 국민으로 규정되는 모두를 뜻한다. 그러니 그들의 판결이 솔로몬이라기보다는 황희 같은 게 더 맞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아닌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법은 절대 가치가 또한 아니다. 헌법을 해석하는 기관 역시도 - 우리가 그들에게 걸고 있는 기대는 그들이 확고한 정의를 가지고 판결을 내릴 것이라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 굉장히 정치적으로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이 옳다고 여기는지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 이 말도 옳고 저 말도 옳지만 - 식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을 상황에 처하게 되겠지.
그렇기에 그저 전문가라고 나와서 확실한 답을 내리는 사람들의 명쾌함 보다는 어쩌면 이럴 수도 있겠고요,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습니다 하는 사람들에게 - 본능적으로는 왜 저래라는 판단을 하겠지만 - 신뢰가 더 가는 것 같긴 하다. 그래서, 이 책이 꽤 신뢰가 가게 되었다.
미국 드라마 <뉴스룸>에서, 방송국 간판 뉴스 프로그램 앵커를 '칭찬' 하며 책임 프로듀서가 한 말이 이거였다. "그는 그 무엇도 '100% 확신하지 않아!" 마침 최근에 본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는 '역사란 부정확한 기록과 불확실한 기억이 만나 생기는 확신'이라고 표현했다. 무언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지만, 이 두 말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책의 한 문장을 옮긴다.
우리는 결국 늘 어둠 속에서 행동하기 마련이므로 선입견은 놓아두고 가볍게 여행하는 것, 눈을 활짝 뜨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