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ense of an ending
* 이 리뷰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책)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역사 만의 문제는 아니다. 책은, 주인공의 기억과 실재의 간극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그 사이에 학창 시절의 애드리언과 역사 선생 간의 논쟁, 그리고 그 시절 자살한 학우의 이야기들이 버무려진다. 기억은 몇 번이고 재조명되지만, 과연 적혀있는 그대로 일지는 의문스럽다. 주인공의 기억만큼이나 베로니카의 기억도 흐릿한 것은 아닐까? 분명한 것은 주인공이 보냈던 편지와, 베로니카의 모친과 애드리언 사이의 아이가 있다는 정도가 아닐까. 애드리언의 일기장 속의 공식들을 떠올려본다. 주인공은 그것을 해석하기 위해 머리를 써보지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곳에는.
당시에 일어난 일을 내 입장에서 해석한 것을 기억에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당시에 있었던 일은 무엇이었던 걸까. 그런 기억들을 떠올려본다. 내가 부끄러워서 지우고 싶은 순간들. 그럼에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들. 하지만 그 조차도 윤색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는 있었지만, 책 속에서의 묘사들을 보면서 그러한 인식이 자만에 빠진 생각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온전히 '내 해석' 속의 기억들일뿐. 그러나 그 당시로 돌아간다고 해서, 그게 내 해석의 여지가 빠진 것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역사의 현장 속에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 편견 없이 들어오게 될 것인가? 아주 직업의식이 투철한 저널리스트라고 해도, 현장 속에서 휘둘리지 않을 리가 없다. 지난겨울의 광화문 광장을 떠올려본다. 그 보다 더 전 2008년의 광장은 어땠던가. 나는 내 기억 속의 나와 같은 사람이었던가?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
그러니 결론적으로 기억은 실재와는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선 전제하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 우리가 그런 존재이며, 우리들 사이의 일들은 우리와 유리되어 있고 각자가 각자의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다. 우원재가 말했듯 그럼, 도대체 철학이 왜 중요한 걸까. 가짜와 가짜가 만났으니 진짜가 둘이 되는 것뿐인가.
70년대가 될 때까지, 그 ‘60년대’라는 것을 경험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60년대에 살면서도 대부분은 50년대식 삶에 젖어 있었다는 뜻이다.
재미있는 말이다. 현시대는 어쨌건 시간이 지나간 후에야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가 스스로에 대한 규정을 하는 것이 웃긴 일인 경우가 많은 것처럼. 내가 지금 살고 있는 2010년대는 훗날 무엇으로 규정될지 생각해보게 된다. 책 속 주인공의 기억에 60년대의 기억들은 - 그 자신의 내면의 갈등들 - 연애사와 관련된 이야기들 속에 녹아들어 있다. 내가 2010년대에 느끼고 쓴 기록은 어떨까? 그러니까 - 애드리언이 20대의 나이에 쓴 60년대의 이야기들이 궁금해지는 지점이다. 주인공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나의 이야기에 대한 생각을 해 본다. 주인공은 일기를 쓰지 않은 것 같다. 나도 일기를 쓰지 않는다. 나의 경험들은 온전히 내 기억 속에 남이 있을 뿐.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들은 내 입장의 이야기일 뿐이다. 때문에 스스로가 자기검열을 열심히 하려 노력하게 되겠지만, 그 자기검열 조차도 내가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의 선별 과정에 지나지 않으니까.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다는 것은 무서운 이야기이다. 내게는. 내가 살고자 하는 나와 실제 내가 다르다는 것만큼. 기억 속의 나는 내가 아니라는 것이. 어쨌든 내가 규정되는 것은 - 타자를 통해서이고 타자가 있음으로 내가 규정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보는 입장인지라, 이해는 되지만 두려운 감정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해한다고 해서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내고,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내는 것.
나는 나이가 든 것일까. 친구들을 떠올려보게 된다.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 매우 기억력이 좋은 친구인데, 과거를 -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 사이의 과거를 미화해서 기억하는 일들. 서로 함께 한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러는 것 같다. 그의 기준에는 나와 함께하는 행동들의 카테고리가 있고, 그 카테고리라면 너와 당연히 함께한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어쨌든 분명 내 기억에는 나는 이마트 파업(홈플러스였던가?) 당시의 현장에 그 친구와 함께 가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러한 기억들은 나이가 들면서 더 심해지게 되지 않을까. 누군가를 규정하는 카테고리는 늘어날 것이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 카테고리로 분류하게 되겠지. 내 개인적인 감정의 호불호와, 나에게의 유불리를 따라서 기억의 백과사전은 집필될 것이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진을 찍고, 일기를 쓰고 - 이제는 동영상까지 남기지만 우리는 우리의 사고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저장매체에 저장된 것들을 즉각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단계로 진화하진 못했으니까.
책임소재를 묻고자 하는 저의 바람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대한
공정한 분석이라기보다는 제 사고방식의 반영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기억들 속에서 우리는 가끔.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리려고 하는 때가 많다. 어쨌든 확실한 캐릭터가 있어야, 증오하거나 사랑하기가 쉽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공경의 대상이 될 뿐, 사랑할 수는 없다. 이해하기 쉽기 위해서는 언제나처럼 - 나와 같은 존재라는 성격을 부여해야 한다. 그래서 기억에는 주인공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주인공의 60년대의 기억에는 베로니카와 애드리언이라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마치 자신의 이야기에 자신이 조연인 양 느껴지는 것들. 열패감 속에서 각색된 기억들은 책임 소재를 환경과 다른 등장인물에게 돌리기 쉽게 만들어주었다.
물론, 잘잘못을 따져야 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책을 보면서 내가 잘못을 따지고 싶어 하는 영역은 대체로 내가 잘못한 일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바꿀 수 없었던 것이라고 위안하는 편이 편하니까, 내 잘못을 없애는 쪽으로 계속 생각하고, 그 생각이 강화되어 기억은 바래지게 되겠지, 어쩔 수 없었다며.
그러나 평균치의 법칙에 따르면,
우리는 불가항력적으로 평균치가 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이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어쨌든 나는 특별한 사람도 아니라는 인식은 삶을 살아가는 태도 중에서 굉장히 속 편한 결과를 가져오기 쉬운 것 중 하나이다. 하지만 한 가지 덧댈 문장이 있다. 우리가 벨 커브 속에서 살아간다는 인식 속에서도, 확률적으로 우리는 그 종의 양 끝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도 기억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좋은 변명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사족.
어쨌든 감당할 수 없는 악플은 달지 않는 것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