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덪
*이 리뷰는 디스커버리(영화)에 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디스커버리는 넷플릭스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1968년 하바드대학 특별위원회는 회복 불가능한 코마를
새로운 사망 기준으로 정의하기 위해 전반적인 뇌기능 정지를
의학적 죽음으로 간주하는 ‘뇌사’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이처럼 현대에 들어와 삶과 죽음은
고유한 과학적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개념이 되었다.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 중에서
사후세계는 무엇인가. 존재하는 것인가. 죽고 나서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물음은 여러 가지 신화적인 모티프로 남아서 다양하게 변주되었다. 드라마 <도깨비>는 환생이라는 설정을 재미있게 활용하였었고, 웹툰 <신과 함께>는 사후 세계에 현생을 심판받는다는 내용을 재미있게 풀어내었다.
영화는 그 사후세계를 평행세계와 같은 방식으로 묘사한다. 가장 후회하는 순간, 혹은 가장 죄책감을 깊게 느끼는 순간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그러나 그 세계는 지금과 연결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어쨌든 '그' 세계와 '이' 세계는 다르다.
여러모로 죽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생명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가? 돌아가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선택에 따라서 무수히 변주되는 다른 세계에 불과한 것일까. 어쨌든 돌아가고자 하는 '사후 세계'는 '선택'의 기로 들이다. 프로스트가 말하기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고 했으나, 영화는 돌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다고 한들 바뀌지 않을 것처럼 묘사하다가, 무언가가 바뀌었다는 식으로 끝을 맺는다.
돌아간다면, 나는 달라질 것인가
돌아간다고 해서 내 선택은 바뀔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무슨 선택을 했단 말인가? 만약, 내 선택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이라고 한다면?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사르트르가 말했든 선택이 삶과 죽음 사이에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선택으로만 우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그 선택이 바뀐다면 더 이상 나는 '내' 가 아니게 되지 않을까 한다. 때문에 죽음만이 그 선택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시간에 드리운 그림자를 온전히 지워내어야만 그것이 바뀌는 게 아닐까. 이영도의 <그림자 자국> 이 떠오른다.
미래는 결정되어 있다. 왜냐면 과거가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영도가 <퓨쳐 워커>에서 한 말이다. 우리의 미래를 지우는 행위(죽음)가 과거를 바꾸는 것이라니 재미있다. 그러나 변화한 그 세계에 내가 설 자리는 어디에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죽음의 순간에, 나는 후회와 미련으로 가득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없다면 그게 온전한 나인 것일까, 의문이 든다.
삶은 무엇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가
삶은 죽음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죽음은 끝이다. 내 존재의 증명이다. 요약하자면 나는 태어나서 살다가 죽었다. 그 마침표. 약속된 휴식에 도달하면 나는 내 선택들에 대한 후회와 선택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미련을 모아서 내가 살았음을 증명할 것이다.
그렇기에, 삶을 위해 죽음을 쓸 수는 없다. 지금의 이야기를 끝내고 새로운 이야기를 쓰는 것이 아닌 이상에야. 어쨌든 사후세계가 <신과 함께>에서 처럼이건, 어떻건 지금의 세계는 사후 세계와는 떨어져 있다. 함께 묶어서 생각하면 머리만 아프다. 어차피 천국에 갈 사람과 아닌 사람은 결정되어 있고, 라는 식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해서 배우다가 머리가 아팠던 기억이 난다.
그러니 온전하게 내 삶은 내 죽음을 찬미하기 위해 쓰일 것이고, 죽음이 내 삶을 사용하도록 하진 않을 작정이다. 최소한. 물론 때가 돼서 가능하다면 존엄사를 선택하고 싶지만 그 조차도 내 삶의 증명을 위한 의지이다. 자기결정권은 오롯이 내 삶을 위해 사용될 것이고 그 삶이 죽음을 결정할 것이다. 내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