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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Oct 09. 2017

<아이캔스피크> by 김현석

말이 통해야 같이 살지 (눈뜨고코베인의 곡)

https://youtu.be/HT57XrJaYE4


영화에 대한 좋은 리뷰, 평은 여기저기 많이 있어서 딱히 그런 내용을 쓰고 싶지는 않다. 

아이즈의 글을 보면 이 영화에 대한 좋은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래서 그냥 내가 느낀 점만 어떻게든 써보고자, 노트북을 열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명의 정의에 관하여서 의학적인, 혹은 법의학적인 정의가 있을 수 있겠다. 철학자들이라면 신나서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내 글솜씨와 생각으로는 그것을 정의할 수가 없다. 그저, 삶이란 '삶' 일 뿐이다.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것. 일어나고 잠들고. 먹고 싸고. 그리고 읽고, 쓰고, 대화하고. 


삶에 대화란 얼만큼의 비중이 있을까. 대화의 수단이 무엇인가를 배제한다면 꽤 높지 않을까. 대화의 상대까지 '사람' 이상의 것을 포함한다고 가정하면 삶에 대화란 필연적인 부산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선후관계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혼자 살지 않는 이상 터치 한 번으로 스마트폰과 대화하거나, 독서토론에서 책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100분 토론에서 정책에 대해서 논쟁하거나 우리는 대화를 하며 살고 있다. 


그것을 '사회'라고 한다. 그런데 그 사회에서 대화하기 힘든 주제가 있다. 그리고 대화의 '주체'로 배제되던 사람들이 있다. <남한산성>을 보았다. 공녀로 수백수천이 끌려간다는 걸 교과서를 통해 배웠고, 돌아온 이들이 화냥년이라는 비하적 표현의 시발점이 된 것을 알고 있다. 어쨌든 역사와 사회의 맥락에서 그 '환향녀' 들은 대화의 대상이 아니었다. 대화의 '주제' 일 수는 있어도 '대화'의 상대방이 되진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아픈 역사에 대해서 숨기거나 합리화하려고 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유사 역사학을 떠올려보면 되겠다. 여기서 우리는 - 민족주의적 혹은 어떤 방식으로 건 배타적인 집단주의적 사고, 세계관을 공유하는 모든 집단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인류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독립운동'을 찬양하기 바빴다. 유관순은 '누나' '언니' 기 되어서 소환될 수 있었다. 그 조차도 대화의 '주제'이지 '상대방' 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숨긴 것은 합리화보다 더 많다. 의도적인 부분도 있지만, 무의식적인 부분도 많을 것이다. 성노예 문제의 경우에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미군 부대 인근에서 한국 정부가 공창을 운영한 사례도 아직 충분히 널리 알려진 것 같진 않다. 이 경우에도 - 다른 모든 문제와 마찬가지로 - 여러 가지 이해관계 속에서 공론화하기에 시간이 더 오래 걸릴 것 같다. 


그런데, 처음으로 돌아가서. 같이 살려면 대화가 통해야 한다. '같이' '살려면' 말이다. 노예의 삶이 삶이 아닐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자유와 평등 같은 개념을 발명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노예의 주인과 노예가 함께 산다는 표현은 잘 하지 않는다. 대화의 쌍방이 아니니까. 노예와 노예끼리는 삶을 함께 영위하겠지만.


그래서 갑자기 그런 생각도 든다. n-word 같은 금기어가 남아 있는 한, 흑인들과 비흑인들은 진정한 대화 상대방이 아니며, 결국 아직 100% 함께 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 물론, 잠들기 전 갖은 생각 속에서 건져낸 아지랑이 같이 희미한 생각이다. 


그러다가 <금발이 너무해> 1편인지 2편인지에서 주인공의 연설 장면이 떠오른다. 미용실에서 유명한 디자이너에게 머리를 받는데 거울을 보니 이상해 보였다. 그런데, 그 사람은 유명한 사람이니까, 옆에서 아무도 이상하다고 안 하니까 가만히 있었다. 머리를 다 자르고 나니 머리가 엉망이 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말을 했어야 했다고. 그러고 Speak up america!라는 구호로 그 연설은 끝난다.


미안하고 미안한 일이지만.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 말이 <아이캔 스피크> 리뷰를 쓰다 떠오른 이유는 이것 때문인 것 같다. 말해주지 않으면 모른다. 정말로. 아쉽고, 미안하고. 슬픈 일이지만 알 수가 없다. 그러니 말해야 한다. 그렇기에 '아이 캔 스피크'라고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습을 해야 한다. 하지 않던 말을 하는 것은 '배움'이나 '준비' 보다는 용기의 문제이다. 영화에서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이태원의 바에 데려가서 말을 시켜보는 설정은 재미있기도 했지만, 그런 내용을 전달해준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기다려주고 - 이해해주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 있어 주어야 한다. 대화란 다시 - 상대방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아무리 말할 것이 있는 이가 '아이 캔 스피크'라고 말한 들, 들을 준비가 되지 않은 이에게는 공허한 외침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 의회, 백악관 등에 있는 '청취를 위한 장치' 들이 참 교만하다는 생각과 대단하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그들은 그들 개개인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와는 별개로 듣기 위한 장치를 여럿 만들어 두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어떠했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나는 그런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니까.


하지만 개인으로는. 영화 속 구청 공무원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민원인의 '상대방' 이 되기 위해 월급을 받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행위를 제대로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상대방이 '대화 상대방' 이 아닌 '민원인'이며 '일' 이기 때문이겠지. 그들을 비난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나도 그렇고, 모두가 그러니까. 하지만 그러지 않았을 때에, 어쩌면 지금 보다 더 힘든 시간을 조금 보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 더 가치 있는 내일이 올 수도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나는 아직 무언갈 말할 용기가 부족한 것 같다. 

사실은 무엇을 말해야 할 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니 우선, 들을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단 생각이 든다. 

말이 통해야 같이 살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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