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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Oct 24. 2017

<데이트리퍼>
by 파비오 문, 가브리엘 바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https://www.youtube.com/watch?v=fqZOF1u_rWM

김국환 <타타타>, 오늘의 브금.


<데이트리퍼> (이하 책) 은 가브리엘 바와 파비오 문의 그래픽 노블이다. 물 건너 쌀국에서 큰 상도 받았다고 하는데 참조 좀 해보겠다고 한국 구글에서 검색을 하니 관련 검색 결과가 1도 안 나온다. 교보문고의 판매 페이지뿐. 책을 보며 뭘 적어야 하나 멍 때 리던 내게는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돌이켜보니 누군가의 의견을 따라 쓰는 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었고 - 보통은 얘가 건드리지 않은 부분은 뭔지 고심하며 글을 썼던 것 같아,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서 그냥 프리스타일로 리뷰를 적어보기로 했다. 



부고 기사

 

삶이란 요약하자면 어떤 것이 되는가. 우리는 모두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다. 그 안에서 삶을 요약하는 건가, 아니면 저 과정 전체가 삶인가. 태어나는 이의 기사는 이제 보기가 어렵다. 매해 첫 아이라거나, 유명인의 아이가 아닌 이상에야. 죽음 역시 누군가에게 널리 잘 알려지진 않는다. 정말 유명한 사람이 아니면 긴 추모 기사는 기대하기 어렵다. 꽤나 성공한 직장인이라면 신문 부고란에 짤막히 적힐지도. 생각해보면 한국의 경우에는 그것도 고인에 대한 내용보다는 지금 잘 나가고 있는 사람과 관계있는 고인이 죽었으니 조문을 하라는 내용인 경우가 많다. 


거시적으로 보면 우리는 태어나서, 살다가 - 죽는다. 특별할 것이 없다. 부고 기사로 나올만한 삶을 사는 이는 흔치 않다. <덩케르크> 마지막에, 지역 신문사에 부고 기사를 청탁하는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죽음은 평등하지 않다. 어쨌든,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은 죽은 이의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의 것이다. 살아있는 이가 죽은 이의 죽음을 평가한다. 좋은 죽음, 나쁜 죽음. 말장난이다. 좋은 삶과, 죽음이 있을 뿐. 숨을 거두는 순간 우리의 존재는 단절된다. 작품에서도, 여러 죽음들은 부고기사로 그저 - 끝맺을 뿐이다. 그 이후는 없다. 부고 기사는 마침표이다. 


내 부고가 있다면, 어떤 글이 어울릴까. 내 친구 중 누군가가 추모글을 적어 줄지도 모르겠다. 페이스북에 친구의 죽음에 관하여 이야기하던 글들을 본 기억이 난다. 거기엔 뭐라고 적힐까. 뭘 두려워하나, 난 이미 죽은 이후인데. 부고 기사란 마침표이고,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하지만 만약에 내가 천국이 실재해버려서 내 부고 기사를 읽게 된다면 무엇을 읽고 싶을까? 삶의 요약에 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졌지만, 내 부고기사는 그렇게 쓰이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OOO, XX세, 태어나서, 살다가, 죽었습니다."




죽음을 느낀 순간들


이런 생각을 했다. 죽음에 임박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 내게도. 책에서는 급작스러운 죽음이 몇 등장한다. 그런 상상 아니, 이미지가 떠오르는 밤들도 있었다. 무서운 영화를 본 밤에는 내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깊게 고민하게 되었었다. 


물에 빠져서 위태로웠던 때가 있었다. 수영을 분명 배웠는데, 기억이 도통 나질 않았고, 같이 여행하던 친구들에게 구해졌다. 그 이후 수영 같은 건 질색이다. 워터 스포츠라니,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인가! 한 번은 장내 출혈이 심해서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글쎄, 두 번째가 더 나을 것 같았다. 서서히 말라 비틀어 죽어갔지만, 생각보다는 그렇게까지 고통스럽진 않았다. 어쩌면 장래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던 와중이어서 그걸 잘 느끼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죽음은 선택 가능한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다. 안락사, 존엄사. 자살. 드라마 <도깨비>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스스로 달려드는 트럭에 몸을 던지는 광경. 그런 사람은 천사라는 식의 묘사가 나온다. 뭐, 그런 것도 선택이다.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담보로 무언갈 행할 수 있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자유의지라는 말이 천박해 보이는 요즘, 그럼에도 그것의 의미를 바라게 만들기 어려운 것이 자기희생이란 생각이 든다. 


죽음은 무엇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가. 삶은 무엇을 위해 쓰여야 하는가. 여기서 '나'를 빼버리면 꽤나 멋진 그림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은 타인의 삶을 위하여, 삶은 타인의 죽음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단 말. 허세, 허위의식. 뭐 그래도 그런 생각이 드는 걸 막진 못하겠다. 



후회와 미련


죽음에 앞서서 무슨 생각을 할까.  이런 이야기가  영화 <디스커버리> 보고 나서 진행된 토론 자리에서 나왔다. 후회를 택할 것인가 미련을 택할 것인가. 후회란 한 것에 대한 후회, 미련은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미련이라는 전제 아래에. 나는 후회와 미련이 나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돌아간다고 해서 그런 선택을 안 할까? 글쎄. 온전히 지금의 기억을 가지고 돌아간다면 모르겠다. 하지만 그 선택을 되돌리는 순간 나는 '내' 가 아니게 된다.


죽음이란 나의 마침표이다. 삶은 일필휘지여야 한다. 이영도는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주퀘도 사르마크' 의 입을 빌려 가필의 결과를 보여준다. 삶이란 작품은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니까 화룡정점. 후회라는 실수도 미련이라는 실패도 포함하여 온전히 나라는 작품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부정할 수는 있지만, 덧씌우는 것은 자기기만일 뿐. 의미 없다. 내 존재는 '지금'에만 의미가 있으니까. 그때 이랬더라면, 저길 가지 않았다면 이런 건 뭐 필요한 행위이지만 실제로 되돌릴 수 있게 된다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위이지 않을까. 


그러니 김국환의 <타타타>. 살다 보면 그런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만이 머리에 남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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