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고독에 맞서 싸우는 방식을 스스로 습득해야만 하는 시절에 관해
"소년은 외로웠다. 어두운 숲 속의 집에서 항상.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가득했는데, 함께할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있을 때는 괜찮았다. 거짓말을 했다. 엄마.... 엄마는 왜 저러는 걸까. 왜 날 떠난 걸까. 혼자서 지내는 동안 술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덩치도 제법 켜져 술을 구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부모가 버리고 간 집은 텅 비었지만 - 또 꽤 필요한 것은 남아 있는 편이었다. 엄마가 남기고 떠난 돈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 가끔은 그게 스트레스가 되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소년은 외로웠다."
소설로 쓰면 이 이야기는 어떻게 될까. 궁금했다. 친구, 아니 지인이었던 사람의 시선에서 바라본 연쇄살인자의 모습들. 친구라는 사람들 속의 기억, 법정 증언, 정신과 의사의 차트 속에서 발견한 편린들로 꿰맨 사건 일지들. 사회의 성긴 부분에서 무너진 가정에서 고독하게 자라나게 된 아이. 동성애 혐오적인 사회 풍토 속에서 동성애를 드러낼 수 없었던 아이.
이영도는 <피를 마시는 새>에서 말하길, 인간은 대등한 존재를 죽여, 잡아먹는다고 서술한다. 형이상학적으로는 우리는 모두 타인의 피를 갈구하는 짐승들이다. 재생산은 파괴를 통해 만들어진다. 그 행위 중 목숨을 잃게 하는 것이 '죄'가 되는 이유는, 대다수가 본능적으로 혐오하고 기피하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일까. 혹자는 '노동력'의 가치라 높은 시절에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서 '살인'을 범죄시 하게 된 것은 아닐까 라고 말했다. 홍정훈은 <월야환담 광월야>에서 '함무라비 법전'을 비난하는 이야기를 한다. '눈에는 눈, 피에는 피'는, 내 피해를 혹독하게 복수할 경우에 사회적인 노동력이 크게 감소하기에 폭력 수단을 국가-혹은 사회가 독점하여 관리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사피엔스>에서 유발 하라리가 말한 것처럼 천부적으로 우리가 받은 것이 아닌 우리의 공동의 상상 체계 안에서 만들어진 도덕규범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우리는 사람을 죽일 수도, 고문할 수도 있고, 놀릴 수도 있도록 탄생하였지만 그러지 않을 수 있는 권한 역시 함께 받았다. 할 수 있다고 해서 모두 해도 되는 것은 아니게 된 것이 인류 사회가 만들어낸 큰 발견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는 규범을 파괴하는 죄를 저지름으로 앞으로 나가기도 하지만, 여기까지라고 선을 긋고 나가지 못하도록 지켜서 사회를 안정화시키고 우리의 안녕과 평화를 도모하기도 한다. 어쨌든 어린아이가 절벽에 떨어지지 않도록 호밀밭엔 파수꾼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회는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할 때도 많다. 또한, 많은 '현대 사회'는 근대적인 가족의 파괴와 더불어 '개인주의'로 거듭나면서 그 역할을 '가정'에서 제대로 환수하지 못한 채로 20세기를 맞게 되었었다. 또한 '매카시즘' 같은 면역 체계적 사회 반응들은 '개인주의'와 별개로 이념투쟁의 구도에서 사회 부적격자들을 탈락시키는 경쟁의 세상으로 밀어 넣으면서 기득권에 유리한 '인자' 들만 사회적인 유전 과정에 포함되도록 하는 노력을 병행하도록 하였다. 때문에,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사라진 채로 갑자기 세상에 던져진 이들은 갑작스러운 고독에 맞서 투쟁하는 방식을 스스로 습득해야만 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개념적인 표현이지만, 자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내면의 사상과 생각 - 그리고 관찰되는 타자의 행동과의 갈등은 이런 형태를 실제로 보여주지 않을까. 나의 유소년, 청소년기의 기억들을 지금 마주하게 되면 가끔 이게 내가 맞는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나의 경우에는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굳건한 행운을 누렸기에 그 갈등 속에서도 투쟁의 소용돌이가 내면의 갈등과 글쓰기로 풀어지는 형태에 머물렀지만 - 그러지 않은 친구들을 보았던 기억도 충분히 많이 있다. 폭력적인 청소년기의 행동들이 그들의 천성 (nature)라고 보는 것은 부당하다고 보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각설. 죄의 원인과 결과를 구분할 필요는 있다. 법정에서 - 그 법체계가 대륙적이건, 미국적이건 관계없이, 적어도 '경제학자' 들이 '범죄학자' 들이 '깨진 창문의 이론'을 들고 나오듯, 무너진 사회와 경제 체제 아래에서 아이들이 불법적인 노동으로 들어가고, 수감되고 다시 범죄자가 되는 고리를 밝혀내듯 개개인도 이제는 '죄'에 대해서 다각적으로 분석, 접근하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 <내 친구 다머>는 그런 면에서 좋은 시작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사람을 - 연쇄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학창 시절의 급우로 두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그런 이가, 아픔을 그대로 끌어안고 작품으로 표현한 사례가 얼마나 될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이 책은 그런 책이고 - 책의 마지막에 기자인 반려자로부터 '네 동창이 살인을 저질렀데'라는 연락을 들은 후 '오, 다마 도대체 무슨 일을 했던 거야'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고 책을 덮은 내 감정은 -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했다.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 30회 전후에 방송된 <일베 햇볕정책> 편에서 나온 이야기. 지금도 술만 먹으면 개저씨가 되어, 소리 지르는 이들. 그들의 시작이 어디었냐고 말하는 모습이 기억난다. 같이 놀 때 재미없다고 은연히 따돌리게 된 것들. 같이 놀아주지 않았던 모습들. 나와는 다르다고 함께하지 않았던 순간들. 그 하나하나는 생채기도 나지 않을 폭력들이었지만 그 폭력들은 쌓여서, 다시 내뱉어지는 속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책에서도, 저자와 그 주변 지인들이 '다머'를 대하던 태도를 보았을 때, '악의 없는 폭력' 들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시절이다. 하지만 그 어떤 누구도 그것을 제대로 짚어 내어주지 못했다. 책에서 어떤 선생도 '다머'의 '알코올 중독'을 지적하고, 고치려 하지 않았다고 나오는 것처럼.
그런 생각이 들어서, 슬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