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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Nov 18. 2017

<언더도그마> by 마이클 프렐

도덕 권력의 이전을 꾀하는 뉴라이트 지식인의 면죄부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사울 알린스키)를 읽었다. 그 책을 주제로 한 <변화의 정치학>(조성주) 도 읽었다. 내용을 정리하여 글을 쓰고 있는데 진척이 되지 않고 있다. 그런 와중에 <언더도그마>(이하 책)을 읽게 되었다. 재미있었다. 논리, 내용 자체는 긴밀한 연관이 되어 있지는 않지만, 반대 진영이라 할 수 있는 곳에서 '사울 알린스키'를 다루는 부분은 흥미로웠으며, <뉴스룸>에서 처음 접해서 관심을 가진 정치집단 '티파티'가 사울 알린스키의 조직 행동 지침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배우고 나서 읽으니 더욱 그랬다. 공산당의 조직론이 사실상 세계 주류 정당 조직에 활용되는 것처럼, 대중 정치 조직의 행동 방식이 그에게 영향을 많이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각설. 이 책은 면죄부다. 가진 자들이 자신의 약점을 감추고,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 전장의 군인들에게 애국이란 면죄부를 주듯이,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 세력들에게 '너 잘못된 거 아냐', 도덕적 논쟁에서 소모되던 지지자들에게 '네가 틀린 게 아냐'라고 말해주는 서적이다. 효과적으로 작동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그런 의도가 읽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일단, 이 책의 문제는 다양한 '발췌'를 통하여 논지를 펼치려고 하는데 - 논문을 쓸 때 인용하는 것 같은 권위를 획득하기에는 어려운 책이다. 적어도 같은 정치적 스탠스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어색하고 불편함이 느껴지는 방식임과 동시에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도록 느껴지도록 쓰였다. 자의적인 발췌와 편집은 자신의 논리를 강화하기 위해서 쓰였고, 자기반성을 통한 논리의 강화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더도그마'라는 말 자체를 부각하여서, 사고를 확장하게 하는 역할로는 훌륭한 책이란 생각이 든다. '행동주의 경제학'과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그 이후의 방법에 대해서는 참 뭐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난삽해서 언급하기도 싫다. '언더도그마'는 증상이다. 원인은? 잘 모르겠다, 해결책은? 글쎄. 이런 느낌밖에 받지 못하는 내용들이다. 


사실 '언더도그마'와 같은 증상은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학습받은' 혹은 '타고난' 미추의 분석을 통해 '아름답다'라고 판단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도 있다. 이런 건 요즘은 잘 안 먹힌다. 아름다운 거랑 도덕적인 가치판단은 별 개지!라는 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다. 어느 정도의 교육과 사회생활을 통해서 도덕적인 판단은 그 원인, 행위 시점의 맥락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학습하게 되니까.


'언더도그마' 가 문제라면,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사건에 대한 '인상비평'을 피하는 대중이 늘어나면 된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언론이 바뀌어야 하고, 정치인이 바뀌어야 하며 사람들이 노동에서 해방돼서 하루 종일 사회 문제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게 될 리가 있나. 그렇다면 남은 하나는 공교육 기관에서 그런 훈련을 반복해서 시키는 것인데 - 공교육이 이렇게 고급적인 사고 판단 능력을 함양하도록 하는 체제를 만들 수 있는 국가는 흔치 않을 것 같다.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가들의 국민들이 다는 인터넷 댓글들만 보면, 적어도 보편타당하게 '언더도그마'를 회피하게 만들 방법은 없을 것 같다.


철학적으로는 '옳고 그름' 이란 무엇인지 고민을 조금만 더 해보면, 개인적으로는 언더도그마란 대중적인 증상이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도 든다. 옳고 그름이란 결국은 사회적인 판단이니까. '마녀사냥' 같은 '증상' 은 지양해야겠지만 - 약자에게 더 친근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저자의 분석대로 '공감능력'에서 나온다면 '언더도그마'는 더 확대되어야 하는 증상이라고 생각된다. '평등주의' = '사회/공산주의' = 파멸 공식이 머릿속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분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을 이야기겠지만. 


왜 우리가 공감능력을 가지고 - 편견인 '언더도그마' 증상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이유는 - 우리는 대체로 실제로 약자이기 때문이다. 거창하게 계급론을 들고 오지 않아도, 몇 가지 특수한 예외 케이스를 빼면 뉴스 사회면에서 보는 약자 편이 읽는 이의 편일 가능성이 크다. 결국 '내 편'의 '편'을 드는 행위이니 그것이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그 이후에 그것을 '도덕적인 절대적 가치'라는 식으로 포장하여 상대방을 매도하는 것은 '마녀사냥' 증상과 연결되어 지양해야 되겠지만, 그 감정 자체는 - 불쌍하다, 쟤가 잘못했네 하는 생각은 굳이 버릴 필요가 있나 싶다. 본인에게 유리한 것일 가능성이 있는데?


반대로 진보적 활동가들이 '언더도그마'를 활용한다고 저자가 비판한 것과 별개로, 진보적 활동가들은 당연히 '언더도그마'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본다. 세월호 유가족의 숫자는 - 혹은 그 피해자의 지인까지 포함해도 1만여 명 수준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사회적 의제로 삼아서 변화를 의도하는 것은 그 피해가 - 사고는 영화 <데스티네이션>처럼 갑작스럽게 오기 때문에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해서 '약자' 에게 공감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나도 저 위치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다. 누구든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 확률이 있다. 재난은 대체로 또한 '약자' 에게 불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일본의 지진 사건 이후, 가난한 청년들은 방사능 방제작업을 위해 동원되기 시작했다. 보라, 약자는 피해를 받는다. 이게 당연한 것이고,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사건 맥락에서 '강자' 가 취할 수 있는 논리이다. '법적'으로 문제없으며 '규제' 자체는 괜찮다고 말하는 것까지는 이해해주겠으나, '사회는 원래 이러니까, 착취나 당해!'라는 식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정치적 행동을 하는 것은 절대로 피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책은 그렇게, 사실 진리는 - 약자들이 아니라 강자들의 '기존 규범 체계' 안에 있도록 도덕적 권력을 자신들에게 부여하는 글쓰기를 통해서 너네 자꾸 '나쁜 편에게' 힘을 실어주지 마, 걔들 너네 이용하는 거야!라는 식으로 말을 건다. 불편하게도 - 이게 실제 영향을 어떻게 끼쳤을지는 모르지만 - 그 결과를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 다음 읽을 책인 <힐빌리의 노래>를 통해서 전 문단의 고민이 조금은 해소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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