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무엇인가
인권이란 무엇인가, 인격을 유지할 권리. 인격이란 무엇인가? 사람다움. 사람이란 무엇인가, 그래,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 실격' 판정을 받기 위해서는 '인간'의 정의가 필요하다. 그다음에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과학의 분류, 생물학적인 분류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고 정의한다면 실격이 되기는 어렵다. 이미 그렇게 태어난 것을 내려놓을 수는 없으니까. 생을 포기하기 전까지는, 아니 생을 마감하고서도 그 존재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
개념을 소거하여 접근해보자. 인간답지 않은 행동들. 부모를 살해하고, 자식을 잡아먹는다. 난교를 하고 약자를 겁탈한다. 그런 이들에게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 짐승 같은 것들이라고 말한다. 그래, 그럼 인간은 부모를 살해하지 않고 자식을 잡아먹지 않고 난교를 하지 않고 약자를 겁탈하지 않는 존재이다. 그럼 그래서는 안된다는 규정이 결국 인간의 범위를 한정한다. 그 규정은, 사람들의 암묵적인 동의와 시대정신이 만들어내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과거에 바넘이 하던 '흑인' 쇼는 인권 탄압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당시의 시대정신을 반영해서 말이다.
규정하는 것은 권력이다. 상술한 흑인 쇼. 여성 인권의 탄압 등은 분리 짓기에서 시작된다. 인간이라면 이렇다 저렇다, 그 규정. 그것은 다수 혹은 폭력의 독점 등으로 형성된 권력의 이름 짓기에서 시작된다. 인간인 것과 아닌 것을 나누기 시작한다. 사람이라면 일을 해야지, 사람이라면 효도를 해야지라는 이데올로기들. 그것을 하지 않는 이를 규정지으면서 인간과 비인간을 나누는 것이다.
왜 그러는 것인가. 인권, 인격.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서,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리바이어던. 만인의 투쟁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 그러나 그 투쟁 상태는 왜 벌어지는 것인가. 우리는 왜 서로 안에서 나누어 싸우는 것일까. 사람에게는 진정한 안타고니스트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의 대항자가 없기에, 우리는 우리 안에서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를 찾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인간 실격 선언은 스스로가 시대정신의 안타고니스트가 되었다는 선언이다. 지금 시대와 나는 맞지 않다, 그러니 인간 실격일 뿐. 그 개인의 방황에 대한 시선에는 온도차가 있을 것이다. 학습된 체제의 규범들 밖의 존재들, 도달할 수 없는 곳을 향해 쏜 화살은 떨어질 것이다. 지평선 밖에, 규범이 없는 세상을 바라보지만 두 다리는 규범의 세계 속에 붙어 있다. 그러니 인간 실격이다. 같은 눈높이, 같은 발걸음으로 함께 가야 할진대, 더 멀리 보고, 다른 곳을 보면 인간이 아니게 되어 버린다.
인간 실격자들. 일본에서는 증발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다. 사라지는 사람들. 사회, 시스템에 굴복하지 않았으나 어울리지 못하니, 혹은 버티질 못하니 사라진다. 그들을 '사람이 아니다'라는 이름을 붙여서 그대로 두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시스템에 맞추어 그들을 재단해야 할까. 아니면 시스템을, 세계를 확장하여 그들까지도 '사람'인 세계를 만들어야 할까? 이런 식의 비겁한 표현을 들으면 쉽게 마지막 선택지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또, 규범에 맞춰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모독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정답은 없다. 존재의 증명은 상대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증명하는 것은 참 바람직하고 아름답지만, 네가 없으면 내가 존재할 수 없다. 다름이 있기에 내가 있다. 인간다움은, 인간답지 않은 것들이 있기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 인간답지 않은 것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해서 고민을 해야 할 텐데, 여태까지 그런 인지를 하고 살아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인지를 통한 세계 확장에 가장 확실한 방향은, 우리가 공유하는 코드, 법칙을 만들어 내는 것이겠지. 그중 하나가 '나라' 단위에서는'헌법' 일 것 같다. 우리가 우리를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은 즐겁고, 어렵고 또 힘든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거기까지는 발전해왔다. 거기에 무엇을 넣어야 하는가를-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를 말하기 위한 준비에는 힘을 좀 더 쏟아야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