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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글스푼

웃었다

지나간 생각의 정리

by Jamin

승부가 갈리고 나면, 어떤 팀이 웃었다는 식의 기사가 뜬다. 왜 웃는 걸까. 이기면 늘 즐거운 걸까, 이런 생각이 든다. 그래, 승리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승리에 열광하는가. 왜 우리는 즐거우면 웃는가.


마지막 질문은 사회적으로 논의해야 할 부분보다는, 진화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부분이 꽤 있지 않을까. 어떻게든 우리는 살아남으면서, 웃는 얼굴이 좀 더 친숙하게 보이기 시작하면서 결국은 좋은 결과를 보고 나면 웃는 얼굴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 혹은, 긍정적인 경험을 할 경우 특정 얼굴 근육이 수축이나 이완되면서 특정 표정들을 짓게 되었고,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확장되면서 이것이 '웃음'이라 규정되고 그것이 순환하면서 기분 좋은 일-웃는 얼굴로 계속해서 이어져 온 것은 아닐까.


그렇다는 생각을 해도, 웃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 참 신기하다. 나는 저 얼굴을 왜 귀여워하는가? 사회적인 관습 때문에? 그럼 애초에 사회적인 관습은 어떻게 형상되었는가. 누가 예쁘고, 누가 귀여운 것을 만들어나가는 것은 단순히 유물론적인 접근 만으로 해석하긴 어려운 것이 아닐까.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창조론 같은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게 되는 것이 그렇게까지 나빠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단 생각도 들게 된다. 이렇게 신비로운데, 웃음이.


그래. 승리, 이기는 경험이 즐겁다면 웃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 이기는 것이 꼭 즐거운가. 예를 들어 월드컵 조별 예선에서 골득실이 밀려서, 이겨 놓고도 16강에 진출을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보자. 그 경우에는 이긴 것 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그러니, 이기는 것 자체가 기쁨을 가져오는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물론, '이겨도 병신, 져도 병신이라면 이긴 병신이 되거라'라는 인터넷 격언이 있긴 하다. 진 것보다는 낫겠지.


왜냐면, 이긴다는 것은 승부의 결론으로 내가 상대보다 더 낫다는 말이 되는 것이니까. 그럼 내가 상대보다 더 낫다는 것은 왜 기쁜가? 어떤 Criteria 에서는 이기는 것이 별로일 수도 있긴 하겠다. 못생김으로 이길 수도 있고, 아니면 돈 없음으로 이길 수도 있다. 하지만 대체로 이기는 것은 - 경쟁은 내가 좀 더 우위에 있는 것이 더 나은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이뤄진다. 그건 - 다시 진화론으로 돌아가서 내가 생존에 더 유리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학습해온 것이 아닐까.


고대에, 우리의 경쟁은 언제나 목숨을 내놓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게임의 승부라는 것이 그 시초가 올림픽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해보면. 씨름이나, 다른 여러 가지 스포츠들의 시초가 살인 기술 연마인 점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그러니 이기는 것은 전쟁 혹은 전투의 승리, 그 이후의 전후 처리 과정이 얼마나 기쁘거나, 힘들거나와 관계없이 살아남았다는 즐거움이 따라오지 않을 수가 없다.


때문에, 게임에서도 이기면 제일 기쁜 것은 역시 캐삭빵, 하드코어 한 상황에서의 승부가 이길수록 극적이고, 즐거운 것이 아니겠는가. 끝날 수도 있다는 상황 자체. 그것을 즐기는 것이고. 때문에 즐거움은 우리가 죽을 수도 있다는 전제 아래에서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의 소멸, 혹은 우리가 가치 있게 여기는 무언가의 소멸. 도박이 재미있는 이유는 내가 수배 수십 배를 벌 수 있다는 것만큼이나, 나는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이지 않겠는가. 올인.


그러니 다시, 승리란 무엇인가. 승리는 경쟁에서 내가 상대방보다 어떤 면에서 우위에 있음을 증명하는 과정이다. 그것에 즐거워하는 까닭은, 그것에 연관된 어떤 것들이 소멸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편으로는 그 승리로 인해 이어질 수 있는 것들 - 지위, 명예 그리고 돈 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과 그에 앞서 그런 것들을 잃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승리 뒤에 웃음을 가져오는 것이다. 생존은 우리의 가장 큰 가치이니까.


때문에 꼭, 승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을 생각해볼 수 있다. 왜냐면 우리가 즐거워하는 이유가 우리가, 패배하지 않았다, 그리고 살아남았다에 그 상당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즉, 이겨서 무언가를 얻는 것은 플러스알파이고, 기본적인 즐거움은 살아남았다, 16강에서 살아남아 8강에 갔다는 것 자체이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부차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따라서, 경쟁에 꼭 동참하지 않아도 자기 자리에서 살아남아 있는 것 자체. 그곳에서 버티고 있는 것 자체가 웃을 만한 일이지 않겠는가. 선두를 다투는 삶들을 바라보면서, 우리 만의 스포츠 토토를 해도 좋고, 혹은 선수 비평을 해도 좋다. 어쨌든 트랙 위에 올라가지 않고 관람한다고 해서 웃을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그라운드의 선수 보다도 스포츠 팬이 더 크게 웃을 수도 있고.


물론 궁극적으로는 그런 순위 싸움 자체에서 멀어져서, 순위를 매기는 세상이 공허함을 떠드는 사람이 되어서 시인처럼, 선비처럼 살아가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다른 사람의 경쟁에 마음을 쏟기 시작하면, 내가 경쟁한 것이 아니면서도 화가 나기도 하고, 짜증도 나기도 하니까.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을 욕하는 것만으로도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모두 다 번민이고, 번뇌라고 생각하고 대오각성하는 것이 최종의 목표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런 각성은 꽤나 느리게 찾아오고, 대체로 그전에 죽음이 먼저 방문하는 편이긴 한 것 같다. 따라서, 각성의 시기를 가지고 죽음과 경쟁하는 것보다는 그저 내려다 두고, 쓸데없는 생각을 개어 놓고는 다시 - 그저 살아 있다는 것을 즐기며 웃으면 어떨까 싶다. 꼭, 웃음에 승리가, 혹은 많은 고민과 다짐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왜 또 그러잖은가. 웃으면 세상이 그대와 함께 웃는다고. 일단 웃어보면 어떻겠는가. 하하



2018년말, 2019년초 언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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